일명 남영득(南寧得, 南英得), 호는 오산(午山). 서울 출신.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를 중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3월 북경(北京)으로 망명, 중국청년회 어학과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장춘(長春)·톈진[天津]·상해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金翰)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3월 1일 톈진으로 가 김원봉으로부터 폭탄반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비용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알고 실행비용을 국내에서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權正弼)·유시태(柳時泰)·유병하(柳秉夏)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2월 21일부터 3회에 걸쳐 서울 내자동 이인희(李麟熙)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그 해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1929년 출감하자, 다시 톈진으로 망명하여 톈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