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의보(毅甫), 호는 옥촌(沃村). 창녕(昌寧)에서 출생. 아버지는 부정(副正) 노엄(盧儼)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증 판서(贈判書) 정사중(鄭思中)의 딸이다. 외삼촌인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침잠, 천인(天人)·성명(性命)을 깊이 궁구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의 엄격한 훈도로 자랐다. 형제 간에 우애가 지극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자제들을 이끌고 의병장 곽재우(郭再佑)의 휘하에 들어가 서기(書記)·참모(參謨) 등으로 활약, 왜적과 싸웠다.
그 후 정유재란 시에도 다시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방어하였는데, 곽재우가 상(喪)을 당하여 귀향,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동지(同志)들과 합심하여 민심을 수습, 화왕산성을 끝까지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학행으로 조정에서 벼슬이 주어졌으나 취임치 않다가 노인직(80세 이상이면 양인이나 천인을 막론하고 주던 관직)으로 첨지중부사에 제수되었다. 창녕(昌寧)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 저서로는 「옥촌고(沃村稿)」가 『광주노씨세고(光州盧氏世稿)』 중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