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화중(和仲), 호는 송재(松齋). 노천계(盧天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노흥길(盧興吉)이고,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노언(盧焉)이며, 어머니는 군기시소윤 김양귀(金良貴)의 딸이다.
1427년(세종 9)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분관되었다. 그 뒤 승문원의 박사·교리(校理)와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직후 집현전에 선임되고, 수찬(修撰)이 되어 지제교를 겸임하며,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고 직강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와 집현전의 교리·응교를 역임, 항상 춘추관직을 겸임하고 경연에 참여하였다. 필선(弼善)·보덕(輔德)·사인(舍人)을 거쳐, 1448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언사(言事)로 지통례첨사(知通禮詹事)에 체직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자시강원좌필선·예문관직제학을 거쳐 집현전직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당상관으로 승진하면서 호분위상장군 겸 지병조사춘추관편수관을 거쳐, 다시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451년에 찬진(撰進)된 『고려사(高麗史)』의 기(紀)·지(志)·연표 집필에 참여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좌승지를 거쳐 호조참판에 승진하면서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과 동지경연사를 겸임하였다. 1455년(세조 1) 예문관제학 겸 동지경연사에 이어 대사헌이 되면서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겸임하였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 형조참판에 체직되고, 이듬해 덕녕부윤(德寧府尹)·도진무를 거쳐 가정대부에 오르면서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예문관제학 겸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8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고, 이 후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경상도관찰사·한성부윤·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1462년 사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죽었다. 많은 저술에 참여했고,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숙종 때 함양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