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김철수의 아들 난영(蘭永)·화영(華永)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김화영의 발문이 있다.
10권 5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각 책별로 권수에 목록이 있고, 이어 권1에 사(辭) 1편, 시 89수, 권2에 시 132수, 권3·4에 서(書) 103편, 권5·6에 청장(請狀) 8편, 잡저 10편, 권7에 서(序) 9편, 기 4편, 설(說) 1편, 발 8편, 전(傳) 2편, 상량문 3편, 명 1편, 권8에 제문 22편, 뇌문(誄文) 9편, 유사 3편, 행장 1편, 권9·10에 부록으로 서천시증유(西遷時贈遺)·제문·유사집록(遺事輯錄)·가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의 「차도정절귀거래사(次陶靖節歸去來辭)」는 1871년(고종 8) 서원 철폐에 항의하여 귀향하면서 지은 것으로 당시 유림의 울연한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시는 대개 영물(詠物)·감회(感懷)·사경(寫景)의 시로 칠언절구·칠언율시가 가장 많다. 특히 「유청량산(遊淸凉山)」 2수는 운치가 있고 표현이 아름다워 대표적인 시로 꼽을 수 있다.
서(書)의 「여기산정장민병(與箕山鄭丈民秉)」 등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뜻이 담긴 내용으로 당시 유림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아들 김난영과 김화영에게 쓴 편지인 「기아난영화영(寄兒蘭永華永)」은 1866년 병인양요 때의 사정을 적고 있다. 양선(洋船)은 부평(富平) 팔미도(八尾島)에 퇴각해 있고, 조정에서는 숙련된 포수(砲手)와 잠수군(潛水軍)을 배치했으니 안심할 수 있다는 것과 당시 참모 유긍호(柳肯鎬)가 적을 격퇴시키고 돌아와 말하기를 양적선(洋賊船)은 7척에 불과하고 적군도 1천명이 채 안 되는 해랑표략지도(海浪剽掠之盜)일 뿐이라고 하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잡저의 「서천록(西遷錄)」은 1871년 2차로 서원을 헐라는 명령이 내리자 저자가 성균관에서 유건(儒巾)을 찢고 반대해 문의(文義)에 유배되는 일을 일기체로 적은 것이다. 「내성사약절목(奈城社約節目)」은 그가 부계장(副契長)이 되어 지은 것으로, 『국조향례합편(國朝鄕禮合編)』과 창로사약(蒼老社約)의 도표를 참고해 사약(社約)·벌목(罰目)·벌칙(罰則)·독약례(讀約禮)와 각종 행례(行禮)의 도표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 당시의 계(契)에 관한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척사제설초록(斥邪諸說抄錄)」에는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조술도(趙述道) 등의 척사에 관한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전의 「제주효열부문씨전(濟州孝烈婦文氏傳)」은 송덕보(宋德寶)의 처 남평문씨(南平文氏)에 관한 것이고, 「열부전씨전(烈婦全氏傳)」은 전수림(全洙林)의 처 옥천전씨(沃川全氏)에 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