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풍(咸豐). 자는 공식(公識), 호는 금계(錦溪).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증이조참의 노사증(魯師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나항(羅恒)·김광운(金光運)·이이(李珥)의 문인이며, 이정구(李廷龜)·이덕형(李德馨)·강항(姜沆) 등과 교유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1602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비롯하여 수원부사(水原府使)를 거쳐 황해수사(黃海水使)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후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아 군산(群山)으로 좌천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병을 사칭하고 귀향하였다.
노인은 1592년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을 따라 이치(梨峙)·행주·의령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자 적정을 살피다가 적탄에 맞아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
3년간 억류되어 있던 중 마침 중국에서 차관(差官)으로 온 임진혁(林震虩)의 배편으로 동료 기효순(奇孝淳)과 함께 명나라로 탈출하였다. 그 뒤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강론하다가 신종(神宗)으로부터 말 1필을 하사받고 1599년 귀국하였다.
1604년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있을 때 통사(統使) 이경준(李慶濬)과 함께 당포(唐浦)에 남아 있는 왜적을 격파해 선조로부터 「당포승전도(唐浦勝戰圖)」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금산의 금곡사(金谷祠)와 나주의 거평사(居平祠)에 배향되었다. 저술로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 지은 「피부동고록(被俘同苦錄)」·「거왜수록(居倭隨錄)」·「왜국지도(倭國地圖)」가 있으며,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 6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