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구에 가까운 몰운대(沒雲臺)의 북쪽 끝부분에 있는 비교적 소규모의 유적지이다.
유적지의 현상은 바다에 면한 동서 양편이 오랜 기간동안 파도에 의해 상당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특히, 서편은 높은 단애를 이루고 있고, 1966년의 발굴 후 집이 들어서 거의 소멸된 상태다. 이 유적은 1934년 일본인 학자에 의한 지표채집과 그 소개로 알려졌고, 1966년부산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로 유적의 내용과 성격이 밝혀졌다.
유적의 층위는 제1층 표토층, 제2층 패각이 섞인 부식토층, 제3층 흑색부식토층, 제4층 역석층(礫石層)으로 되어 있다. 퇴적상태에 따라 제1층과 제3층의 2개층만으로 된 부분도 있다. 그리고 이 4개층 중 유물이 검출된 층은 제2층과 제3층이다.
출토유물은 제2층에서는 적갈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녹각제도자병(鹿角製刀子柄) 등이 검출되었다. 제2층 바닥과 제3층에서는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빗살무늬토기·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흑요석편(黑曜石片) 등이 검출되었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는 검출되지 않았으나 지표채집을 통해 소개된 것 중 겹아가리[二重口緣]의 토기조각도 있다.
적갈색연질토기로는 납작바닥[平底]의 바닥조각[底部片]과 외반(外反)된 아가리조각편, 굽다리접시[高杯] 및 시루편, 쇠뿔잡이[牛角形把手] 등이 있다. 회청색경질토기로는 굽다리접시·납작바닥항아리[平底壺]의 파편 등이 있다. 덧무늬토기는 아가리와 몸통에 3열 또는 수열(數列)의 사선·직선·곡선의 융기문을 가진 것이나 모두 파편으로 그릇모양을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빗살무늬토기는 바탕흙[胎土]이 사질(砂質)과 점토질(粘土質)의 2종이 있다. 양적으로 사질은 극히 적고 점토질이 대부분으로 남해안 빗살무늬토기 바탕흙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릇모양으로는 전체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바닥조각은 둥근바닥[圓底]이며, 아가리조각은 곧은아가리[直立口緣]를 하고 있다.
문양은 없는 것도 있으나 있는 것은 아가리에서 몸통까지에만 시문되어 있고, 바닥에는 시문하지 않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문양의 종류로서는 압날문(押捺文, 引文)·빗금무늬[短斜線文]·어골문(魚骨文)·집선삼각무늬[集線三角文]·점렬문(點列文)·손톱무늬[爪形文] 등이 있다.
이 유적은 자연층위는 4개의 층으로 되어 있으나, 유물의 출토상태 및 내용을 보면 시기를 달리하는 상·하 2개의 문화층을 가지고 있다. 적갈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로 대표되는 상층은 원삼국 내지 가야시대의 문화상을 보여준다. 융기문토기·빗살무늬토기·붉은간토기로 대표되는 하층은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간직한 층으로 남해안 신석기시대문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신석기시대문화층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 곳에서 검출된 토기의 종류나 문양이 지닌 특징 등에 의해 문화층의 상한(上限) 또는 존속시기를 달리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 중에서도 어느 시기에 편년되는냐 하는 세부적인 연대편년문제에 있어서는 아래와 같은 다른 견해들이 있다.
첫번째는 이 문화층을 남해안 신석기시대의 전기간 동안에 걸친 시기로 보는 견해이다. 특히, 융기문토기·압인문토기의 존재를 이유로 이 층의 상한을 신석기시대 조기(早期)에 편년하고 있다.
두번째는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시기로 보는 견해이다. 후기의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태선문토기(太線文土器)의 존재 등은 중기의 문화적 요소를 지닌 것이므로, 이 문화층의 존속시기를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시기의 것으로 편년하고 있다.
세번째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이 그릇의 윗부분에만 있고 아랫부분에는 없는 점, 문양도 간단해 다양하지 못하고 퇴화된 양상을 보여주는 점, 붉은간토기가 출토되는 점 등을 이유로 신석기시대 말기의 것으로 본다. 실연대로는 서기전 2000년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대포패총은 비록 규모나 출토유물의 양은 적으나 뚜렷한 층위를 가진 유적으로, 신석기시대와 원삼국 내지 가야시대 두 시기의 문화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신석기시대의 문화층에서 검출된 각종의 토기조각은 남해안 신석기시대 문화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패총은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문화연구에 중요한 유적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