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김인섭의 증손 김천수(金千洙)와 성재기(成在祺)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아들 김수로(金壽老)의 서문, 권말에 최홍락(崔弘洛)의 발문이 있다.
본집 14권 8책, 속집 2권 1책, 부록 2권 1책, 합 18권 10책. 석인본. 동아대학교 도서관·전남대학교 도서관·국민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본집 권1·2에 시 401수, 권3에 소(疏) 3편, 주장(奏狀) 2편, 권4∼7에 서(書) 279편, 권8에 설(說)·변(辨)·기행문 등 잡저 28편, 권9에 서(序) 40편, 권10에 기(記) 43편, 발(跋) 22편, 권11에 잠(箴) 4편, 명(銘) 12편, 찬(贊) 3편, 전(箋) 3편, 혼서(婚書) 4편, 상량문 5편, 축문 9편, 제문 15편, 권12에 신도비명 2편, 비 6편, 묘지명 5편, 묘갈명 30편, 묘표 11편, 권13·14에 행장 23편, 유사 9편, 전(傳) 6편, 속집 권1에 부 1편, 시 167수, 권2에 서(書) 79편, 설·논 등 잡저 9편, 서(序) 11편, 기 4편, 발 9편, 명 1편, 제문 2편, 부록 권1에 연보, 권2에 만장 11편, 제문 52편, 서술(敍述)·갈음기(碣陰記)·고유문·상향문(常享文)·상량문·고성문(告成文)·부록발(附錄跋)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기교를 배격하고 진솔하게 표현하려 하였다. 문장은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를 본받은 것이 많다. 서(書) 가운데 「답산천재회중(答山天齋會中)」은 당시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남명집(南冥集)』과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정인홍(鄭仁弘)의 손으로 된 흔적이 있다고 하여 이를 수정하려고 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한 것이다.
변 가운데 「심즉리설변(心卽理說辨)」은 주리(主理)를 주장한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을 반박한 것이다. 그는 심즉리설은 양명학(陽明學)에서 근원한 것으로 이론이 될 수 없고, 그 설이 사람에게 미치는 화는 매우 심각하다고 하여, 주리설(主理說)·주기설(主氣說)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소 가운데 「정사상봉사(丁巳上封事)」에서는 충직한 인물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무리를 멀리할 것, 공도(公道)를 넓혀 사사로움이 없음을 보일 것, 염치를 장려하여 예양(禮讓)을 높일 것, 임금의 위엄을 중히 할 것, 과거를 바르게 할 것, 청탁을 배격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의상십조봉사(擬上十條封事)」에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기본을 세울 것, 성학(聖學)을 가르쳐 심술(心術)을 바르게 할 것, 내외를 엄히 하여 화란(禍亂)을 막을 것, 태자(太子)를 잘 가르칠 것, 충신을 가까이할 것, 재상을 선택하여 책임을 지울 것, 기강을 진작하여 풍속을 장려할 것, 학교를 권장하여 교화(敎化)를 밝게 할 것, 절의(節義)를 표창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주장 가운데 「주청금절청사물허여자빈마장(奏請禁絶淸使勿許女子牝馬狀)」에서는 여자와 암말을 요구한 청나라 사신을 목 베고 명나라의 유민들과 협력해 청나라를 멸망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상금부원정장(上禁府原情狀)」은 1862년(철종 13) 단성민란(丹城民亂)으로 인해 아버지 김령(金欞)과 자신이 의금부에 구속되어 심리(審理)를 받기 전에 올린 글이다. 관속들의 포흠(逋欠: 관물을 사사로이 소비함)과 이무미(移貿米: 환곡폐단의 하나)를 횡령한 사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시정요구 사실, 자신과 아버지가 관여하게 된 경위, 서리(胥吏)를 자체적으로 선출하게 된 동기 등 단성민란의 전말(顚末)이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이 책은 그의 일기인 『단계일기(端磎日記)』와 함께 19세기 향촌사회의 모습, 향촌에 거주하는 산관(散官)의 의식 구조와 학문 등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