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몽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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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황중윤(黃中允)이 지은 한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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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황중윤(黃中允)이 지은 한문소설.
개설

총 20면. 한문필사본. 몽유록계 소설로 앞부분 2·3장이 낙장되어 있다.

「달천몽유록」의 창작동기는 작자의 7대손 황면구(黃冕九)가 쓴 가장(家狀)에 밝혀져 있다. 그 글에 의하면 작자가 34세(1611년, 광해군 3) 때 증광시(增廣試)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마에 막혀 충주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머무르던 중 한 이상한 꿈을 꾸고는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앞부분이 낙장되어 있어 몽유 이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내용

몽유자가 수부(水府)에 초대되어 시를 짓고 용왕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있을 때에 신립(申砬)이 함께 한다. 신립이 자신에 대해 세상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는다. 생은 탄금대 패전이 신립의 지(智)가 없는 결과라고 한다고 대답한다.

신립은 탄금대 배수진은 결전의 의지를 보인 것이며, 정예병이 없는 사회적 제도가 자신을 패장으로 만들었다고 원망한다. 이어서 신립의 동생 신길(申硈)도 형의 편을 들어 탄금대 패전은 병농일체(兵農一體)의 병제(兵制)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이어서 용왕이 곡을 연주하고 신립 · 신길과 막빈들이 함께 글을 짓는다. 생도 함께 글을 짓고 용왕으로부터 시를 지어 받아 ‘수 년 안에 청운에 오른다.’는 덕담과 함께 사자의 인도로 수부를 나오게 된다.

「달천몽유록」에서 탄금대 패전은 태평시대에 제도적 미비로 정예군을 얻지 못한 것이 패인이며, 결코 신립 자신의 지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패전의 책임을 신립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며, 여타의 상벌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선조 33)에 창작된 윤계선(尹繼善)의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도 역시 신립의 탄금대 패전을 주제로 하는 작품인데, 황중윤의 작품은 그로부터 십여 년 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패전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고, 패전하게 된 근원적 원인으로 적에 대한 대비가 없었고, 군대의 편성은 물론 상벌(賞罰)이 바르게 시행이 부족했음을 지적하였고, 당시의 사회제도나 병농제(兵農制) 등 모병(募兵)의 제도적 잘못에 있다고 하여, 좀 더 패전에 대한 심층적 원인분석을 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한문소설사(韓國漢文小說史)』(차용주, 아세아문화사, 1989)
『황동명소설집(黃東溟小說集)』(김동협 편, 문학과언어연구회, 1984)
「황중윤소설연구(黃中允小說硏究)」(김동협, 경북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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