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6월 2일에 인근에 위치한 대관령 국사성황사와 함께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는 지은 지 40여 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으나, 『임영지(臨瀛誌)』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전하는 대관령 산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그 역사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한 평 남짓한 조그만 골기와 맞배지붕의 당으로서 ‘산신당(山神堂)’이라는 현판이 가로로 붙어 있다. 왼쪽 기둥에는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이라고 씌어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강인간지오복(降人間之五福)’이라고 씌어 있다.
신당 안에는 ‘대관령산신지신위(大關嶺山神之神位)’라는 위패와 함께 산신도가 있다. 이 산신도는 백발노인이 옆에 범을 거느리고 있으며, 뒤에는 한 동자가 시종을 거느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림 자체는 보통의 산신도 유형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모시고 있는 산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선조 광해군 때 허균(許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김유신(金庾信)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민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산신제의 유풍은 남효온(南孝溫)의 『추강냉화(秋江冷話)』나 향토지인 『강릉지(江陵誌)』 · 『임영지』 등에 나타나는데, 음력 4월 15일에 제를 지낸다.
산신당 앞 가까이에는 편편한 돌을 쌓아놓은 수비당 또는 수구돌이 있는데, 이것은 산신을 따라다니는 하위 신인 수비를 위한 것으로 산신제 때 풀어먹인다.
이 산신의 기능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농경 · 질병 · 한발 · 노정(路程)에 있어 인간의 행복을 관장한다. 강릉의 지리적 조건이 태백산맥과 동해 사이에 평야를 끼고 있어 풍농(豊農)을 기원하는 한편, 어촌의 풍어(豊漁)도 기원하였다.
그러한 현실적 요청에 의하여 대관령 산신도 존재하게 되었으며, 산신을 제사하는 산신사(山神祠)도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관령 산신은 영동 지방이 개척되고 영동 주민들이 정주(定住)한 시대에 이미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