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대구 복현동 고분군은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덧널무덤·독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모두 140여 기의 분묘가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101기가 보고되었다. 보고된 분묘는 모두 구덩식 돌덧널이지만 주변에서 독널무덤도 조사된 적이 있다. 봉토가 남아 있는 분묘는 없으나 원래는 봉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토의 형태는 돌덧널이 2기 또는 3기가 나란하게 배치되거나 장축이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는 것들이 많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두 사람 무덤인 양장분과 여러 사람 무덤인 다장분도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덧널무덤·독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개설
복현동 고분군에 봉토가 남아 있는 분묘는 없었으나 원래는 봉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토의 형태는 돌덧널이 2기 또는 3기가 나란하게 배치되거나 장축이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는 것들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한 사람무덤(單葬墳)만 축조된 것이 아니고 두 사람무덤(兩葬墳)과 여러 사람무덤(多葬墳)도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두 사람무덤이나 여러 사람무덤의 경우 돌덧널 상호간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점으로 미루어 선축된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후축된 돌덧널을 설치하고 봉토를 이어나간 것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
출토유물은 빈약하여 큰 것의 경우도 토기가 20여 점에 불과하고, 장신구로는 금동제귀고리가 출토된 것들이 몇 기 있다. 마구류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고, 철기류로는 화살촉, 도끼, 손칼(刀子), 낫, 미늘쇠(有刺利器) 가운데 한 두 종류만 출토되었다. 이외에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漁網錘) 등이 출토된 분묘가 몇 기 있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 · 후엽 사이로 추정되고, 무덤에 묻힌 피장자들은 당시 대구지역의 최고지배집단이었던 달서 고분군 축조집단의 하위집단으로서 신천 동편의 영역을 주무대로 한 촌락집단 유력자들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 『대구복현동고분군(大邱伏賢洞古墳群)Ⅰ』(윤용진·이호관, 경북대학교박물관·대구직할시, 1989)
- 「옹관묘(甕棺葬)의 일례(一例)-삼국시대(三國時代) 석곽묘(石槨墓)에 배장(陪葬)된 옹관(甕棺)-」(윤용진, 『문화재(文化財)』4, 문화재관리국,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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