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늘쇠는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다. 양쪽 가장자리를 오려서 삐쳐내어 가시가 돋친 것처럼 하고 아래는 장대, 혹은 나무자루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4세기 전반의 덧널무덤〔木槨墓〕에는 덩이쇠를 이용하여 하단부는 양쪽에서 오려서 공부(銎部: 자루에 끼우는 부분)를 만들고 측면을 양쪽에서 오리고 길게 늘여서 소용돌이무늬로 말아놓은 것이 최초의 형식이다.
이후 시기 신라고분에서는 가시가 돋친 것처럼 만들고 크기도 그리 크지 않지만 가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은 크고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특히 함안 도항리고분군에서 출토되는 것은 네 귀퉁이가 삐쳐 나온 장방형의 몸통에 작은 구멍을 규칙적으로 뚫고 가장자리에는 가시를 삐쳐내는 대신 철판을 오리모양으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신라와 가야의 일정 수준 이상의 무덤에서 출토되던 미늘쇠는 5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소멸되고 합천 저포리고분군과 같은 변두리의 고분에서 퇴화된 형태로 발견된다.
형태로 보면 일상적인 용도를 생각하기 어려우며 자루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의장행열과 같은 데서 장대에 끼워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정되므로 의기(儀器)로서 성격이 있음을 이해하여 볼 수 있다. 미늘쇠가 최상위 급의 무덤에서 출토되지 않고 중형급 이상의 신라·가야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 미늘쇠를 부장한 피장자의 신분은 지배세력 가운데 중·상위 계층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