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일대에서 봉분이나 분구는 계급사회의 진전에 따라 특정 친족이나 개인의 무덤을 하나의 기념물로 거대화 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고 발달하게 되었다. 다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 매장시설을 덮는 봉분으로 축조하기도 하고 혹은 그것을 담은 분구가 구축되기도 하며 원형분, 방형분, 타원형분, 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등 서로 다른 형태를 채용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고분은 진시황릉과 같은 초대형의 흙무덤〔封土墳〕을 비롯하여 방형분이 우세하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방형분과 원형분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이래 요동과 압록강유역의 돌무지분구묘〔積石墳丘墓〕중에는 방형으로 축조된 것이 있다. 요령성 여대시(旅大市)의 강상묘(崗上墓)나 누상묘(樓上墓),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의 오도령구묘(五道嶺溝墓)는 기본적으로 방형구획의 돌무지분구묘이다. 요령성 환인현 고력묘자(高力墓子)고분군에서 보는 것 같은 고구려 초기의 무기단식, 혹은 기단식 돌무지무덤〔積石塚〕도 기본적으로는 방형을 취하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다. 서기전 108년에 우리나라 북서부에 낙랑이 설치되면서 대형의 흙무덤이 축조되는데 이 역시 방대형을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방대형의 돌무지분구를 축조하다가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으로 바뀐 이후에도 여전히 방형 흙무덤을 유지해나갔다. 반면 신라와 가야지역에서는 봉분으로 원형 혹은 타원형으로 구축하는 방식이 유행했다. 마한·백제지역의 경우는 주구움무덤〔周溝土壙墓〕이나 방형주구묘와 같은 마한의 저분구, 저봉분은 방형구획이 많고 한성백제의 왕릉이 방형 돌무지무덤이지만 원형분을 비롯한 다양한 분구와 봉분이 채용된다. 백제지역에서 방형분의 전통이 꾸준히 이어진 곳은 영산강유역인데, 나주 신촌리 9호분, 복암리 3호분, 대안리 3호분 등은 대형의 방형분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