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락은 농산어촌 지역에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집과 집이 결합하여 서로 긴밀하게 상호 작용을 교환하는 소규모의 지연적 생활공동체이다.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마을’ 혹은 ‘동네’라 부르고, 한자로 표기할 때는 촌(村), 촌락(村落) 또는 동(洞)이라 적었다. ‘부락(部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널리 사용된 용어이다. 원래 한국 사회에서 사용한 ‘부락’이라는 용어는 북방 이민족이 사는 마을, 또는 귀화한 북방 이민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특수 마을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 용어가 일본에서는 일반 주민들이 사는 마을뿐만 아니라 특수 신분층인 천민이 거주하는 마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마을을 격하하여 일괄적으로 ‘부락’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촌락을 주거가 밀집된 소규모 지역 사회로 규정하더라도 촌락의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촌락의 규모나 지리적 특성에 따라 하나의 촌락 안에 다시 ‘윗마을’과 ‘아랫마을’ 혹은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등으로 부르는 하위 영역이 존재하기도 한다. 촌락 내부에 존재하는 이 소규모 마을은 사회적 통일성을 갖는 독립된 촌락으로 보기보다는 촌락 내부에서 협동 및 친화 관계가 보다 긴밀하게 이루어지는 근린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때로는 여러 개의 촌락을 묶어서 행정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행정 촌락으로 편성하기도 한다. 행정 촌락은 행정의 편의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구성한 편제로서 그 경계가 수시로 변경될 수 있으며 주민들의 소속감도 매우 약하여 하나의 사회적 통일체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근린 집단과 자연 촌락, 자연 촌락과 행정 촌락을 혼동하기도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 이들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촌락은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 정착 농경 생활을 영위하던 신석기시대 이후에 등장하였다. 수렵과 채취에 의존하던 구석기시대에는 이동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영속적인 촌락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및 초기 철기시대의 주거지 유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주거가 밀집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촌락은 비록 촌락 주민들의 생활을 이끌어 가는 촌장 혹은 족장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외부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지도 못하고 촌락 내부의 사회 체계도 분화되지 못한 단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촌락은 점차 통치 체계의 최말단 기구로 편입되어 직간접적으로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게 되고, 내부적으로도 공동생활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제도를 발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촌락의 모습은 「신라촌락문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고려시대 이후에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신라 후기에 형성된 지방 호족들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하였으므로 국가 권력이 직접 촌락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지 못하고 지방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호족을 통해서 촌락민을 지배하고 통제하였다. 호족의 일부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 관인으로 성장하고 지방에 남은 호족은 촌락민을 직접 지배하는 향리층을 구성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어 감에 따라 향리층도 점차 중앙 관인으로 진출하거나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려시대의 촌락은 일반 백성 또는 양민이 거주하는 촌락과 특수 신분층인 하층민이 거주하는 향(鄕) · 소(所) · 부곡(部曲)이 구분되어 있었다. 향 · 소 · 부곡은 일반 촌락에 비해서 신분적으로 차별되었다. 특히 소는 금, 은, 동, 철, 도자기, 종이, 먹, 소금 등 특수 물품을 생산하여 국가에 공납하는 공장(工匠)들의 거주지로서 이들이 부여받은 역은 특히 더 무거웠다. 이 밖에도 교통 요지에 형성된 역촌(驛村)과 도진촌(渡津村), 군사 주둔지에 형성된 진촌(鎭村) 등의 특수 기능을 담당하는 촌락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어 군현 제도를 정비함에 따라 향 · 소 · 부곡은 없어지고 면리제(面里制)가 실시되었다. 조선 초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5호(戶)를 1통(統)으로, 5통을 1리(里)로 편성하고, 몇 개의 리를 합쳐 1면으로 하는 오가작통의 면리제를 규정하고 있다. 통에는 통수(統首)를, 이에는 이정(里正)을,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두어 조세의 징수와 부역의 동원, 범죄와 유망의 방지 등을 자치적으로 규율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면리제는 명목상의 편제에 그치고 실제 운영에서는 말단 행정 기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통수와 이정 및 권농관은 행정 실무의 집행자라기보다는 수령과 향리의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었다. 이러한 면리제 아래에서 향촌 사회는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수령 중심의 행정 조직 체계와 유향소나 향약을 통해 자율적 향촌 지배를 모색하던 재지사족 세력이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연대하는 가운데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은 자연 촌락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자연 촌락은 주민들의 사회관계가 누적된 생활공동체로서 행정 조직과 재지사족의 압제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한편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 제도를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 갔다. 재지사족이 군현 단위로 향약(鄕約)을 결성하거나 여러 개의 자연 촌락을 묶어 동계(洞契)를 결성하여 주민을 교화하고 사족 중심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기층민들은 자연 촌락을 중심으로 촌계(村契)를 조직하여 자치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어려운 일에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하였다. 질서를 어지럽힌 자를 공동으로 규제하고, 도로와 우물, 동사(洞舍)를 공동으로 관리하며, 농업 노동과 길흉사 때의 협동을 위한 계, 두레, 품앗이 등의 협동 조직도 발전시켰다. 향약이나 동계가 사족 중심의 질서 확립과 주민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능적 결사체의 성격을 지녔다면 촌계는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결속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면리제는 시기에 따라 그 운영에 다소의 변화가 있었지만 대체로 조선 말기까지 이어져 오다가 일제강점기에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종래의 오가작통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재편된 면리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때 재편된 면은 조선시대의 면보다 범위를 훨씬 넓혀서 지방 행정의 중심으로 삼고, 그 밑에 1~3개의 자연 촌락을 하나로 묶어서 행정 촌락인 법정리로 설정하여 명예직인 구장(區長)이 행정 실무를 뒷바라지하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개편된 이러한 행정 구역이 대체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행정 구역의 개편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주민들의 생활은 여전히 자연 촌락을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었다.
촌락은 마을의 입지나 거주민들의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주거의 밀집 정도에 따라 집촌(集村)과 산촌(散村)으로 나눌 수 있다. 광활한 농경지를 배경으로 한 구미의 농촌에서는 농가와 농가가 서로 멀리 떨어진 산촌의 형태가 많지만, 산지가 많고 경작지가 협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집촌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경작지가 극히 한정된 산악 지역에서는 골짜기마다 한두 가구씩 거주하는 산촌을 이루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화전민촌이 있다.
촌락이 자리 잡은 지리적 위치에 따라 평야촌(平野村)과 산촌(山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넓은 들을 배경으로 하는 평야촌은 산촌에 비해 촌락의 규모가 크고, 경작지가 비교적 좁은 산촌은 평야촌에 비해 촌락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수리 시설이 정비되지 않았던 고대나 중세 시대에는 지대가 낮은 곳은 우기에 홍수의 피해가 빈번하여 촌락을 이루어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비교적 지대가 높은 산기슭이나 구릉 지대에 많이 거주함으로써 산촌의 비율이 높았다. 조선시대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수리 시설이 정비되면서 점차 저지대로 촌락이 확산되어 평야촌이 늘어나게 되었다.
촌락이 형성된 과정에 따라 자연 촌락과 행정 촌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 촌락은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촌락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그 속에서 자족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는 지역적 단위이다. 이는 고유한 촌락명을 가지고 다른 촌락과 구별된다. 공동의 수호신에게 동제를 함께 지내는 신앙 공동체이며, 전통적 규범이나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에게 공동의 제재를 가하는 규제 집단이며, 생업 활동이나 길흉사에 서로 돕는 생활공동체이다. 행정 촌락은 행정의 편의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구획한 일정한 범위로서 ‘○○리(里)’로 부른다. 대체로 2~3개의 자연 촌락을 묶어서 하나의 행정 촌락을 구성하고 있지만, 촌락의 규모가 크면 하나의 자연 촌락이 하나의 행정 촌락을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자연 촌락을 1리, 2리로 구분하여 두 개의 행정 촌락으로 나누기도 한다. 행정 촌락에는 이장(里長)을 두어 면의 행정 실무를 보좌하게 한다.
마을에 거주하는 종족 구성에 따라 종족촌락(宗族村落)과 각성촌락(各姓村落)으로 나눌 수 있다. 종족촌락은 한 종족이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여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 마을로서 흔히 집성촌(集姓村)이라 부른다. 동족촌락 혹은 동성촌락으로 부르기도 한다. 종족촌락은 조선 중기 이후 여자가 재산 상속에서 제외되고, 혼인 후 남자가 처가 마을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던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쇠퇴하여 분가한 형제들이 부모의 거주지 주변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역사가 길고 지역 사회에서 잘 알려진 종족 마을의 중심 종족은 사회적 위세가 강한 양반 신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종족 마을에 거주하는 타성은, 중심 종족과 인척 관계에 있는 비슷한 신분의 양반인 경우도 있지만, 과거 이들에게 예속되어 있던 낮은 신분적 배경을 지닌 경우가 많다. 이런 마을에서는 집의 구성 원리가 종족의 범위를 넘어 마을에까지 확대되어서 혈연적 요소가 마을공동체 운영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며, 과거의 신분적 차별이 여러 면에서 잔존해 있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세력이 비슷한 두 종족이 한 마을에 공존하게 되면 배타적 종족 결합 의식이 충돌하여 심각한 갈등이 유발되기도 하고, 세력이 약한 종족은 점차 마을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래서 종족촌락은 한 성씨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일성종족촌락(一姓宗族村落)이 주를 이룬다.
각성촌락은 여러 성씨가 혼재하여 혈연적 요소의 영향이 약해지고 지연적 결합이 주민들의 사회관계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된다. 거주하는 주민들의 신분적 배경에 따라 양반들이 대대로 살아 온 반촌(班村)과 상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민촌(民村)으로 나눌 수 있다. 신분을 중시하던 전통 사회에서는 반상 차별 의식이 작용하여 유명한 조상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반촌은 민촌에 비해서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반촌이라 하여 양반들만 거주하였던 것은 아니다. 양반가에 예속되어 있던 상민이나 천민들도 마을에 함께 거주하였다. 이들은 양반가의 가사 업무를 보조하거나 양반가의 경작지를 대리 경작하여 생계를 영위하였다. 특수 신분층이 살았던 촌락은 특별히 구분해서 백정촌(白丁村), 재인촌(才人村), 광대촌(廣大村), 아전촌(衙前村) 등으로 불렀고 거주 지역도 제한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주민들의 생업 활동에 따라 농업을 주로 하는 농촌, 어로 활동에 종사하는 어촌, 금, 은, 동, 석탄 등을 채굴하는 광산촌,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이어가는 화전민촌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마을을 보다 규모가 큰 집으로 의식하여, 집의 구성 원리가 마을에까지 확대된다. 촌락 주민 상호 간의 인간관계도 가정이나 문중 내의 관계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6~7년 미만의 연령 차가 있을 때는 친구로서 평등하게 대하지만 그 이상의 연령 차가 있을 때는 형님을 대하듯이 하며, 15년 이상 차이가 나면 아저씨, 30년 이상 차이가 나면 할아버지를 대하듯 한다.
집에 가장이 있고, 문중에 문장이 있는 것처럼 촌락에는 촌장(村長), 향장(鄕長), 존위(尊位) 등으로 불리는 최고 어른이 있어서 촌락 공동체의 운영과 사회 통합에 구심적 역할을 한다. 촌장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서 선출되는 것은 아니지만 덕망이 있는 연로자 중에서 ‘동네 어른들’이 추천하여 동회에서 인준하는 방식으로 추대된다. ‘동네 어른들’은 촌장의 교유 집단으로서 촌장과 더불어 마을을 이끌어 가는 중심 세력이 된다. 촌장의 아래에 조선시대에는 이정(里正), 일제강점기에는 구장(區長), 해방 후에는 이장(里長)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게 하고, 그 밑에 이임(里任)이나 소임(所任)을 두어 마을의 대소 잡역을 담당하게 한다. 이임이나 소임은 대개 마을에 거주하는 하층민이 맡는다.
촌락의 주요 사항은 마을 총회에서 결정한다. 마을 총회는 동회 또는 대동회라 부르는데 각호 1인씩 참여하여 평등하게 의결권을 가지는 민주적 의사 결정 기구이다. 촌장이나 이장을 선임하고, 도로의 보수, 공동 우물의 정비, 공동 임야의 관리, 주민들 사이의 노임 등 주요 사안을 협의하여 의결한다. 질서를 어긴 주민이 있을 때는 동회의 결의를 거쳐 공동으로 규제하기도 한다.
촌락의 공동체 규제는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상습 폭행, 성폭력 등 윤리적 규범을 해쳤을 때 주로 나타나는데 가벼운 위반일 경우에는 촌장이나 동네 어른들이 불러서 나무라거나 경고를 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심하면 사회적 격리, 동리매, 추방을 결의하기도 한다. 사회적 격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사회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다.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고, 서로 왕래하지 않으며, 금전 대차나 농기구 대여를 금지한다.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는 촌락 사회에서 사회적 격리는 매우 심한 고통이기 때문에 당사자는 대개 수일 내에 전체 주민에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여 제재를 해제한다. 위반이 반복되거나 정도가 심할 때는 동리매를 행하기도 한다. 멍석말이를 하거나 동신목에 묶어 두고 주민들이 돌아가며 상징적인 매를 가한다. 한 마을에서 더 이상 함께 살아가기 어렵다고 판단이 되면 추방을 결의하기도 한다. 위반 행위가 파렴치하여 5일장에서 만나는 것도 심히 불쾌하다고 생각되면 시장권을 달리하는 ‘50리 밖으로 떠나라.’는 단서를 붙여 추방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동체 규제는 빈번하지 않지만 일단 결의되면 당사자나 그 가족에게는 매우 큰 불명예가 되기 때문에 주민들은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촌락의 주민들은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협동 조직을 구성하였다. 한국의 촌락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하였던 협동 조직으로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계, 두레, 품앗이를 들 수 있다.
계(契)는 특정한 목적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업 기금을 걷고 그 기금이나 이식으로 목적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의 협동 조직이다. 그러므로 계의 종류는 주민들의 생활상의 필요만큼이나 매우 다양하다. 수 명이 결합하는 작은 규모에서부터 수백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에 이르기까지 규모도 천차만별이며, 추구하는 목적도 친목이나 상호 부조에서부터 공공사업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계의 종류는 추구하는 목적이나 기능에 따라서 생산, 구매,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기능의 계, 공공사업이나 공공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공익적 기능의 계, 성원의 복리와 상호 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 성원의 친목과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사교적 기능의 계, 조상 숭배와 공동 제의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기능의 계, 자제 교육과 학문 연찬을 위한 교육적 기능의 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정한 계는 이러한 기능 중 어느 하나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고 대개는 몇 가지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계의 가입은 개인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임의로 선택할 수 있지만, 특정 집단의 성원이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형태도 있다. 계에 참여하는 성원의 범위는, 촌락의 경계를 넘어서 지역 사회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같은 촌락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한정된다. 그래서 계 조직을 통한 중첩된 사회관계는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마을의 사회 통합을 강화하는 기능도 한다. 이러한 계의 전통과 구성 원리는 한국인의 사회관계에 다양하게 원용되어서 오늘날의 도시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계가 광범하게 존재한다.
두레는 마을이나 저수지의 몽리지역(蒙利地域)을 단위로 전 경지에서 일제히 공동 작업을 하는 공동 노동 조직이다. 공동 작업의 전 과정을 총지휘하는 행수(行首)는 지역에 따라서 영좌, 좌장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행수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조직을 구성하여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진행한다. 주로 논농사 지역의 모내기와 김매기 작업에 동원되었다. 풍농을 기원하고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 농악과 같은 공동 연희가 병행되기도 한다. 경작 농가는 각호 1인씩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두레의 성립 배경으로는 공동체적 전통, 논농사의 특수성, 노동 집약적 영농 조건, 농업 생산력의 미발달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두레는 일제강점기까지 널리 행해졌으나 해방 이후 농촌 사회에서 거의 사라졌다. 사유 재산 제도의 발달, 농업 기술의 발달, 화폐 경제의 침투 등이 소멸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레의 정신은 오래도록 남아서 두레와 유사한 공동 작업의 형태를 오늘날에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품앗이는 1대1의 노동 교환 체계이다. 특정인이 여러 사람에게 하루씩 노동을 제공해 주고, 자신이 필요할 때 여러 사람을 일시에 동원하는 협동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품앗이는 노동 교환 체계이면서 노동 차용, 노동 저축 방법이라 할 수도 있다. 자신이 노동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대규모 결합은 불가능하고 대개 수 명에서 십 수 명 정도가 결합한다. 노동 능률을 높이고, 적기에 노동을 집중해서 투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한다. 두레가 주로 벼농사의 모내기와 김매기에 한정되는 데 비해 품앗이는 모든 종류의 노동에 걸쳐서 광범하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품앗이의 결합 원리는 노동의 교환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두루 원용된다. 경조사의 부조 교환, 인정의 교환 등에서 받은 만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관념은 바로 품앗이 원리의 사회적 확대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은 경조사의 상호 부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장례를 위한 상호 부조와 협동 체계는 촌락마다 하나의 관행으로 조직되어 있다. 상조계, 상두계, 초롱계 등으로 부르는 이 조직은 부고의 발송,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 장례 기간 상가 지키기, 문상객 접대, 운구와 매장 등 장례의 전 과정에 걸친 업무를 분담하여 체계적으로 수행한다. 촌락의 규모가 크면 이러한 상조계가 몇 개의 근린 집단으로 나뉘어 구성되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종족별로, 혹은 신분별로 상조계가 구성되기도 한다.
장례뿐만 아니라 혼인이나 회갑 등의 행사에 서로 돕기 위한 조직도 촌락을 단위로 결성되어 있었다. 개별 가족이 마련하기 어려운 혼인 의례에 필요한 가마나 혼구, 일시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잔치에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그릇을 촌락 단위로 비치하여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화재나 수해를 당하거나 가옥을 신축할 때는 주민들이 하루 혹은 2~3일간 무상으로 노동을 부조하는 ‘ 울력’의 전통도 있었다. 마을에 따라서는 촌락 공유의 임야를 마련하여 임산자원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송계(松契), 방풍림을 조성하고 이를 보존하고 육성하기 위한 금송계(禁松契) 등도 주민의 복리를 위한 촌락공동체의 주요한 협동 조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촌락에서는 전통적으로 주민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기원하는 마을 공동의 신앙 의례를 행해 왔다. 마을의 수호신에 대한 이러한 제사 의례를 내륙 지방에서는 동제라 불렀고, 해안 지방에서는 풍어제, 별신굿, 용왕제 등으로 불렀다.
제의의 대상이 되는 신은 지신인 경우도 있고, 산신인 경우도 있고, 해신 또는 용왕신인 경우도 있다. 때로는 전설적 인물이 산신으로 좌정해서 동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특정 종족의 조상이 공동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동신이 좌정하고 있는 것으로 의식하는 제당의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산 위의 큰 바위, 고갯마루나 마을 입구의 돌무더기인 서낭당, 오래된 거목인 당신목, 당집 등이 제의의 장소로 사용된다. 때로는 이러한 것들이 복합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일반인들은 이러한 제의의 장소 그 자체를 신앙의 대상인 것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공동 신앙의 제의는 무속적 요소와 유교적 요소가 복합되어 있는데 무속적인 것이 원형이고 유교적인 것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해안 지방의 의례에서는 무속적 요소가 전 과정을 주도하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제의를 행하는 시기는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의 야간에 행하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특정한 시기에 택일해서 지내는 경우도 많이 있다.
공동 신앙에는 공동 연희가 병행되는 예가 많다. 공동 연희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 의미도 가지지만 마을 주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사회 통합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동제와 공동 연희를 억압했던 것은 마을 단위의 사회 통합이 식민 통치에 저해 요소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동 연희로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것은 농악 놀이였다. 농악 놀이는 비단 신앙 의례뿐만 아니라 명절, 잔치, 두레, 운동 경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즐기는 기회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마을에서 농악기를 마련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함께 즐겼다. 그 외에도 탈춤이나 가면 놀이, 줄당기기, 차전놀이, 석전 등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은 한국 농촌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마을의 모습들이다. 이러한 전통적 모습 중에는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아니하고 지속되는 부분도 있지만, 사회변화에 따라 소멸되거나 약화된 부분들도 매우 많다.
근대 역사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마을 생활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는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지속된 일본의 식민 통치, 해방에 뒤이어 발발한 1950년의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과정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크게 붕괴시켰고, 전쟁을 위한 일제의 동원 체제는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유리시켰다. 그 결과 전 국민의 1/7이 유민화되어 해외로 이동하였고, 마을의 자치 조직, 협동 조직, 공동 유희가 소멸되거나 축소되었다. 1950년의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고, 취약한 경제 기반마저 송두리째 파괴하였다. 좌우의 이념적 갈등은 지역 사회 내의 전통적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대규모의 피난민 이동과 생존을 위한 극한 투쟁은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산업화의 영향은 또 다른 방향에서 마을 생활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젊은이가 도시의 산업 인력으로 흡수됨으로써 촌락 사회의 인구 구조를 변화시키고, 도시 중심의 화폐 경제 체제는 농촌의 경제 기반을 재편시켰다. 농촌과 도시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확대되면서 촌락 사회의 봉쇄성도 약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오랜 세월 동안 공동체적 삶을 유지해 오던 촌락 사회 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개인주의의 확산은 촌장과 동네 어른들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더 이상 공동체적 규범을 유지하고 비규범적 행위를 규제하기 어렵게 되었다.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규제나 기능은 부모나 개별 가족에게 위임되었고, 주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해 갈등을 조정하는 일은 공식적인 사법 기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촌락 사회의 인구 유출은 인구 구조의 노령화를 촉진하여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촉진하고 전통적인 협동 조직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두레는 해방 후에 거의 소멸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많이 행해지던 품앗이는 노동 인력의 감소와 화폐 경제의 보급으로 임금 노동으로 대체되고 있다. 공적인 금융 기능과 각종 복지 대책이 확대 보급되면서 경제적 기능이나 상호 부조적 기능을 수행하던 다양한 계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장례 시의 상호 부조를 위해 마을마다 존재했던 상조계도 화장이 보급되고 중장비 이용이 늘어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촌락 사회의 안녕과 풍농 및 풍어를 기원하던 촌락 공동 제의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촌락에서 동제를 중단하였고, 해안 지방에서 행해지던 풍어제도 규모가 축소되거나 개최 간격이 늘어나고 있다. 공동 제의의 소멸과 함께 공동 연희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거의 모든 마을에서 행해지던 이러한 공동 신앙 의례와 공동 연희가 근대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오늘날에는 소수의 마을에서만 전승되어 민속 보존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촌락 사회의 변화는 도시에 가까울수록 더욱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도 변화되기 이전의 전통적인 모습을 찾아보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