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현재 영남제일관문(嶺南第一關門) 앞에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와 함께 서 있다. 원래는 영영축성비 옆에 나란히 있었으나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1932년 현재의 대구향교(大邱鄕校) 경내로 이전되었고 다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비신(碑身)은 청색 화강석으로 만들어졌고, 높이 191㎝, 너비 73㎝, 두께 45㎝이며, 비갓은 황백색 화강석으로 된 팔작지붕형을 이루고 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대구읍성의 성벽을 원래보다 더 높이고, 신축(新築) 97보, 개축(改築) 118보, 보축(補築) 1,409보 하였으나 치첩(雉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의 신축이 2,680보, 문루(門樓) 및 공해(公廨)는 신축 72칸, 중건(重建) 37칸, 중수(重修) 57칸, 보수(補修) 265칸이었다.
또 동 · 서 · 남 · 북 사대문의 문루를 고쳐 짓고, 성벽 위에 6개의 누각을 세웠다고 하며, 모든 누각은 단청(丹靑)을 올리고 치첩은 백회(白灰)로 분장하였으며 낙성식도 거행되었다는 등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 비석은 1870년(고종 7) 3월에 비문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겸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김세호(金世鎬)가 짓고, 글씨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최석로(崔錫魯)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