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적 9,881㎡. 199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용황초등학교 신축부지에서 발견되었다. 1998년 9월∼1999년 4월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연못자리와 건물지, 석축렬(石築列) 등 통일신라시대 유구가 확인되었다.
특히 호안석축(護岸石築), 인공섬 두 곳, 입수로(入水路), 물받이 시설로 이루어진 인공 연못자리는 전체적으로 볼 때 경주 안압지(雁鴨池)와 유사한 구조여서 발견 직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연못은 호안 석축의 동쪽, 서쪽, 남쪽만 확인되었고 북쪽은 조사대상 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발굴되지 않았다. 확인된 연못의 규모는 동서 38m, 남북 66m이고 조사되지 않은 북쪽을 제외한 연못의 둘레는 약 140m이며 연면적 약 840평이다.
호안석축의 평면 형태는 네모꼴에 가까우며 동쪽 호안이 직선 형태를 하고 있는 데 비하여 남쪽과 서쪽 호안은 완만한 곡선을 이룬 형태이다. 호안석은 주로 산석(山石)과 천석(川石)을 이용하였으며 일부 장방형으로 가공한 할석(割石)도 사용하였다.
인공섬은 남북 방향으로 길쭉한 형태이며 지름이 25m이고 단축(短軸) 방향인 동서 방향은 20.5m, 섬 전체 둘레는 약 108m이며 면적은 170평 정도이다. 섬 둘레는 할석과 천석을 이용해 수직에 가깝게 3단 가량 쌓았다. 남쪽 섬에서 북쪽으로 15m가량 떨어진 곳에 또하나의 인공섬이 있으나 동서 3m, 남북 0.8m밖에 확인되지 않았다.
연못의 바닥은 모래와 자갈돌이 혼합된 기반층(基盤層) 위에 전면적으로 갈색점토를 약 20cm 두께로 다지고 정지(整地)하여 물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바닥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낮아지게 하여 동쪽에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다.
연못에 물을 공급하는 입수구(入水口)는 동남쪽 가장자리 바깥에 위치하며, 남쪽 호안에는 물받이시설을 두었는데 아마도 발굴되지 않은 북쪽 호안과 서북쪽 호안에 출수구(出水口)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연못의 동쪽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지가 있는데 이 건물지의 중앙부가 인공섬의 동쪽 연못바닥의 교각지(橋脚址)와 연접해 있는 점으로 보아 누각 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지와 연접하여 인공섬으로 통할 수 있도록 하는 교각시설의 흔적이 있으며, 연못의 동남쪽 가장자리 밖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지가 있으나 구체적인 성격은 알 수 없다.
특히 동쪽 건물지에는 적심석(積心石)이 남아 있어서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으며, 그 주변에서 많은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수막새와 귀면와는 화려하면서도 힘찬 기운을 잃지 않고 있다.
이 원지 유적의 중심연대는 출토유물로 볼 때 8세기 무렵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궁원지(宮苑池)인 안압지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정원 유적이다. 또한 최근에 일본의 아스카에서 발견된 원지 유구(苑池遺構)와의 관련 등 당시 정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