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후 우리 나라의 법부와 재판에 대해 관여와 간섭을 본격화하였다.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주요지방에 그 하부기관인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였고, 또한 이토(伊藤博文)는 통감으로 취임하면서 법부 재판소에 28명의 일본인 법무보좌관을 배치하였다.
1907년 12월 23일 새로 <재판소구성법>을 제정해 종래의 지방재판소·한성부재판소, 각 개항장재판소, 순회재판소·평리원(平理院)·특별법원을 폐지하고, 구재판소(區裁判所)·지방재판소·공소원(控訴院)을 두어 1908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게 하였다.
이 때 대심원은 새로운 3심4계급제의 최고·최종심이었다. 지방재판소나 공소원의 제2심 판결에 대해서 상고심, 공소원의 재판에 대해서 항고의 재판권을 행사하며, 황족(皇族)의 범죄에 대해서 제1심 겸 종심의 전속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원장을 두고, 민사부와 형사부를 두었으며, 각 부는 5명의 판사로 구성해 관등이 제일 높은 판사가 재판장이 되었다. 어떤 부에서 상고건을 심의한 뒤 종래의 판결례와 다른 의견이 있을 때는 대심원장에게 보고하고 대심원판사 3분의 2 이상이 참석해 각 부 연합으로 재판하도록 하였다.
또한, 검사국(檢事局)을 두어 검사총장이 하급검사국을 지휘 감독하였다. 물론, 대심원장과 대부분의 대심원판사·검사는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판사는 정인흥(鄭寅興)·함태영(咸台永)·홍우석(洪祐晳) 3명이었고, 검사는 홍종억(洪鍾憶) 1명뿐이었다.
예전의 의금부의 터(지금의 제일은행 본점)에 새로 지은 청사를 사용하였다. 1909년 7월 12일 한일간에 ‘한국사법급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가 조인, 교환되어 대한제국의 사법행정 사무가 일본정부에 위탁되게 되었다.
10월 16일 <통감부재판소령>이 공포되고 10월 28일<재판소구성법> 폐지가 반포되면서 10월 말로 폐지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마지막 최고심으로서 종말을 고하고 그 기능은 11월 1일부터 통감부고등법원으로 대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