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의 친척 동생[族弟]이다. 793년 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의심이 많고 포학하여, 즉위한지 1년 만에 국인(國人)에게 살해되었다. 폐위되었기 때문에, 후대에 폐왕(廢王)이라고도 불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원래 문왕에게 아들 굉림(宏臨)이 있었는데, 그가 일찍 죽어 대원의가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굉림에게는 아들 화여(華璵 : 발해 제5대 성왕)가 있었고, 문왕에게는 굉림 외에 숭린(嵩璘 : 발해 제6대 강왕)이라는 작은 아들이 있었다. 따라서 대원의의 즉위는 문왕의 직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찬탈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의가 찬탈로 왕위를 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문왕 말기의 동경(東京) 천도와 천도 주도세력이 그의 즉위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해의 정치세력은 동경 천도를 둘러싸고 반대파(상경파)와 찬성파(동경파)로 세력이 나뉘어졌던 것으로 보는데, 대원의의 사망 후 즉위한 성왕이 곧바로 상경(上京)으로 천도한 것을 근거로 한다.
대원의는 재위 기간이 짧아 별다른 대외 활동과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794년 정월에 당(唐)에 내조(來朝)하였던 왕자 대청윤(大淸允) 등 30여 명의 사신은 대원의 때 파견된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