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의 개석과 지석은 2012년 중국 서안(西安) 동쪽 근교인 용수원(龍首原)에서 출토되었다. 묘지에는 고제석 일가가 당으로 이주하게 된 경위와 고제석의 미덕‧혼인 등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고제석은 649년에 태어나, 674년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 내정리(來庭里)의 자택에서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무덤은 만년현(萬年縣)의 산천원(滻川原)에 두었다.
고제석은 묘지에 출신을 국내성인(國內城人)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원래 고구려의 국내성에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을 출신지로 밝히고 있는 것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제석의 일가는 문헌 기록에 확인되지 않지만, 고구려에서 상당히 유력한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지에 따르면 고제석의 증조는 이름이 복인(伏仁)으로, 고구려의 대상(大相)과 수경성도사(水境城道使), 요동성 대수령(遼東城大首領)을 역임하였다.
또한, 묘지에는 당 정관(貞觀: 627~649) 연간에 천자가 고구려와의 갈등을 이유로 조치를 취하자, 고제석의 조부 고지우(高支于)가 당에 귀부(歸附)한 것으로 나온다. 구체적인 시기는 당 태종 때 고구려 원정이 있었던 645년에서 648년 사이로 보인다. 고지우는 당에서 역주자사(易州刺史), 장잠현 개국백(長岑縣開國伯),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였고, 그 아들 즉 고제석의 부친인 고문협(高文恊)은 선위장군(宣威將軍), 우위 고릉부장상 절충도위(右衛高陵府長上折衝都尉), 상주국(上柱國)을 지냈다.
고제석은 고문협의 장녀(長女)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혼인하였는데, 묘지에 혼인한지 “겨우 그믐과 초하루를 채우고(纔盈晦朔)”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누구와 혼인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묘지의 “대당 우효위 영녕부과의도위 천부군 고부인 고씨 묘지(大唐右驍衛永寧府果毅都尉泉府君故夫人高氏墓誌)”와 “천씨 가문에 시집와서(結姎泉門)”라는 구절을 통해, 같은 고구려 유민인 천씨 일가와 통혼(通婚)한 것으로 여겨진다. 자녀는 혼인 기간이 길지 않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