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망묘지의 발굴 경위와 현 소장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묘지는 사위인 해동(海東) 서찰(徐察)이 작성하였다. 묘지에는 고원망의 가계와 이력에 대해서 나온다. 특히 발해인 출자 의식과 고구려 유민 2~3세대로 아버지 고흠덕(高欽德)과 함께 하북과 요서 지역에서 군사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고원망은 당나라에서 697년에 태어났고, 740년에 44세로 사망하였다. 관직은 정번부과의(净蕃府果毅) 겸 보새군부사(保塞軍副使), 평주 노룡군유주 청화군 이부절충도위(平州廬龍軍幽州淸化軍二府折衝都尉) 겸 안동진부사(安東鎭副使), 겹욕부절충(郟鄏府折衝), 좌효위낭장(左驍衛郎將), 안동도호부 부도호(安東大都護府 副都護) 겸 송막사(松漠使) 등을 역임했다.
묘지에 따르면 고원망의 선조는 중국 은나라 사람인 비간(比干)의 아들로, 요동(遼東)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간을 선조로 내세운 것은 부회(附會)이다. 그리고 가계에 대해 요동에 살다가 혹은 하북(河北) 지역으로 옮겼고, 발해 고씨(渤海高氏)와 종맹(宗盟)이며, 혹은 막남(漠南)에 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 고씨는 중국 고대의 군망(郡望)을 의미한다기보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발해국 출자 의식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유민의 상당수는 막남 지역에 이주되어 군사활동에 종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고선지(高仙芝) 가계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고원망 가계는 당나라에서 살고 있는 현실 때문에 중국 계통으로 출자를 부회하면서도, 고구려 계통이라는 이중적인 출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원망의 가계는 고구려 말기에 당으로 이주했다. 고원망의 아버지 고흠덕의 묘지에 따르면, 고원망의 고조인 고원(高瑗)부터 고구려의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을 대대로 세습하였다. 고흠덕의 묘지에 고원망의 조부인 고천(高千) 만이 당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과 고흠덕이 부친의 공으로 관직을 받은 것으로 볼 때, 고원망 일가가 당으로 이주한 시기는 고천 때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묘지명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도이(島夷)와 돌궐 및 거란 도독 △△于에 대한 군사활동에 참여한 내용이다. 도이는 발해를 가리키며, 거란 도독 △△于는 730년대 초 발해와 연대하여 당나라와 전쟁을 치뤘던 가돌우(可突于)이다. 발해는 732년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733년에는 돌궐 및 거란과 마도산(馬都山) 등지에서 당군과 전투를 치뤘다. 이 전쟁에서 고원망과 안동도호부 소속의 고구려유민들은 발해와 돌궐, 거란을 대상으로 군사활동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원망은 사망 당시 안동도호부 부도호 겸 송막사로 발해, 돌궐, 거란 등을 대비하는 군사 최고 지휘관의 한 명이었으며, 당시 가장 최전선이었던 연군(燕郡)의 공사(公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