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왕은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795~809년이며 연호는 정력(正曆)이다. 제3대 문왕의 작은 아들이자 제5대 성왕의 숙부이다. 이름은 대숭린이다. 문왕 사후 집안의 아우인 대원의가 왕위를 찬탈하고 1년 만에 다시 문왕의 적장손인 성왕이 즉위하는 내분이 있었다. 성왕이 즉위 후 얼마 안 되어 서거하자 강왕이 왕위를 이어 내분을 수습했다. 당나라는 이 내분을 발미로 국왕을 군왕으로 낮추어 책봉했으나 적극적 외교활동으로 국왕의 지위를 회복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며 주도적인 외교를 펼쳤다.
발해 제3대 문왕의 작은 아들이며, 제5대 성왕의 숙부이다. 이름은 대숭린(大嵩璘)이다. 연호는 ‘정력(正曆)’이다. 재위 기간은 794~809년이다. 문왕의 사망 후 족제(族弟)인 대원의(大元義)가 왕위를 찬탈하고 1년 만에 국인(國人)에게 쫓겨나자, 문왕의 적장손인 성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성왕은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죽고, 강왕이 왕위를 이어서 내분을 수습하였다.
이때 발해의 내분이 당(唐)에 알려지게 되자, 당은 강왕의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내상시(內常侍) 은지섬(殷志贍)을 보내어, 강왕을 ‘발해국왕(渤海國王)’이 아닌 ‘군왕(郡王)’으로 낮춰서 책봉하였다. 이에 강왕은 책봉호(冊封號)를 ‘국왕(國王)’으로 올려줄 것을 요구하며, 거의 매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798년에 당 덕종(德宗)은 강왕을 ‘은청광록대부 검교사공(銀靑光祿大夫檢校司空)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805년에는 당 순종(順宗)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 검교사공(金紫光祿大夫 檢校司空)’을, 806년에는 ‘검교태위(檢校太尉)’를 받았다.
강왕은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강왕은 처음부터 일본에 보낸 국서에 “큰 사업을 잇고 삼가 조상의 위업을 거느리게 되어 조정의 기강은 예전대로 되고, 강역은 처음과 같이 되었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내었고,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며 대일(對日) 외교에 주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은 발해의 대규모 사신단 파견과 잦은 방문으로 부담을 느끼고, 방문기한[聘期]을 6년으로 제한하려고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발해 사신의 왕래와 교역이 빈번해지자, 804년에는 일본 서북지역인 능등국(能登國)에 객원(客院)을 설치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강왕의 사후에는 아들 대원유(大元瑜)가 즉위하였는데, 발해 제7대 정왕이다. 또 다른 아들인 대언의(大言義)와 대명충(大明忠)은 각각 제8대 희왕, 제9대 간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