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의 묘지는 1990년대 중국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칠리촌(七里村)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낙양시 신안현(新安縣) 철문진(鐵門鎭)에 있는 천당지재(千唐誌齋)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의 찬자는 당대(唐代) 유명한 문장가인 위승경(韋承慶)이며, 글씨는 유종일(劉從一)이 썼다. 묘지에는 고질의 가계와 활동 내용 등이 나온다. 특히 문헌 기록에 보이지 않는 마미성(麻米城) 전투 내용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의 요동 지역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준다.
고질은 626년에 태어났고, 697년 요동의 마미성에서 전투 중에 72세의 나이로 아들 고자(高慈)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자(高慈)의 묘지는 1927년에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지에 의해 고질의 이름이 성문(性文)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질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본래 이름[諱]은 질이며, 자(字)가 성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묘지에는 그 출신에 대해서 요동 조선인(遼東朝鮮人)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멸망 뒤 많은 고구려유민이 고구려를 곧바로 출신지로 밝히지 못하고, 요동인 또는 조선인이라고 출자(出自)를 밝힌 것과 같다. 묘지에 따르면 19대 선조인 고밀(高密)은 후한 말엽에 연군(燕軍)에 맞서 본국(本國: 고구려)을 지키는데 공을 세워, 고씨 성을 하사받고 식읍 3천호에 봉해졌으며, 금문철권(金文鐵券)을 받고 대대로 세습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고질의 증조인 고전(高前)은 삼품(三品) 위두대형(位頭大兄)이었고, 조부 고식(高式)은 이품(二品) 막리지(莫離支)였으며, 부친 고량(高量)은 삼품(三品) 책성도독(柵城都督) 위두대형(位頭大兄) 겸 대상(大相)이었다.
고질은 삼품 위두대형 겸 대장군이었는데, 고구려와 당의 전쟁 때 형제를 이끌고 당으로 귀화하였다. 당에서 669년부터 690년대 초까지 명위장군(明威將軍) 행우위익부좌랑장(行右衛翊府左郎將), 운휘장군(雲麾將軍) 행좌무위위익부장랑장(行左武威衛翊府中郎將),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은승도안무부사(銀勝道安撫副使), 유성현개국자(柳城縣開國子),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행좌응양위장군(行左鷹揚衛將軍), 유성현개국공(柳城縣開國公) 등을 역임하였고, 주로 하북과 요서지역에서 군사활동을 하였다.
696년 영주(營州: 현재 중국 조양) 지역에서 거란의 추장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71세의 고령임에도 여하도토격대사(濾河道討擊大使)이자 청변동군총관(淸邊東軍總管)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이 반란에는 대조영(大祚榮)이 이끄는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도 참여하였고, 이후 698년 발해의 건국에 성공하게 된다. 고질은 697년에는 좌옥금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이 되어 요동지역에서 반란군과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마미성에서 반란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채,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질 정도로 싸우다 포로로 잡혀 죽었다.
고질은 사후 공을 인정받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좌금오위대장군(行左金吾衛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추증되었다. 장례는 전사한지 3년 뒤인 700년에 아들 우옥금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국인(鞠仁)이 치렀고, 무덤은 낙주(洛州: 지금의 낙양) 합궁현(合宮縣) 평낙향(平樂鄕)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