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선은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906년∼926년이며, 발해의 마지막 왕이다. 대인선이 즉위했을 때는 거란이 부족 통일을 이루고 발해를 크게 위협하던 시기였다. 대인선은 후량과 신라, 여진 등과 긴밀히 연계하여 거란의 팽창과 침략에 맞서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수십 년 동안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서방원정을 마친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에 친정을 감행한 뒤 한 달 만에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함락시키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대인선은 야율아보기가 거란으로 회군할 때 끌려가 거란의 수도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대인선은 발해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907?∼926년이다. 대인선은 원래 발해의 제13대왕인 대현석(大玄錫)의 뒤를 이은 제14대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중국학자인 김육불(金毓黻)이 『당회요(唐會要)』에서 건녕(乾寧) 2년(895) 10월에 발해왕 대위해(大瑋瑎)에게 칙서를 내린 기사를 발견하면서, 대위해가 제14대 왕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대인선은 1대가 내려간 발해의 제15대왕으로 인정되었다. 그의 정확한 즉위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907년 5월 후량(後粱)에 왕자 대소순(大昭順)을 사신으로 파견하면서, 발해 국왕인 대인선의 이름이 처음 기록에 나온다. 따라서 대인선은 적어도 907년 초 또는 그 이전에 즉위한 것을 알 수 있다. 926년 1월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에 의해 상경성이 함락되면서 발해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대인선이 즉위한 때는 마침 요서(遼西) 북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성장한 거란이 부족 통일을 이루고, 발해를 크게 위협하던 시기이다.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907년부터 거란의 대가한이 되었고, 916년에는 황제를 칭하면서 대외 정복 전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북중국과 서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동과 발해 서북쪽의 여진, 실위, 오고부 등을 공략하여 발해와 긴장이 고조되었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 따르면 대인선은 야율아보기가 거란 8부를 통일하고 해(奚)마저 병탄하자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은밀히 결원을 맺었다고 한다. 신라와의 결원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나, 거란이 해를 평정한 911년에서 멀지 않는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발해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도리어 『요사(遼史)』에 발해 멸망 직후 행해졌던 논공행상에 신라가 포함되어 거란을 도와준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후삼국으로 나뉘어 있던 상황에서 신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정벌에 나서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신라가 직접적으로 거란을 돕지는 않았지만, 발해와의 결원을 지키지 않고 거란이 발해를 정벌하는 데 관망한 대가로 보기도 한다. 신라와의 결원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대인선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후량과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고, 여진 등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거란의 팽창과 침략에 맞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920년대로 들어서며 발해와 거란의 군사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거란은 908년 발해와 국경이 가까운 요하(遼河) 하구로 추정되는 진동해구(鎭東海口)에 장성(長城)을 쌓고 요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919년에는 요양고성(遼陽故城)을 동평군(東平郡)으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하고 발해 공격의 전방 기지로 삼았다. 이후 여러 차례 군사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거란의 세력 확장에 발해가 대응한 기록은 924년에 요주(遼州)를 공격하여 거란의 자사(刺史)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백성을 약탈한 기사가 유일하다. 그리고 마침내 서방원정을 마친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에 황후, 황태자 배(倍),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이끌고 친정을 감행한 뒤 한 달 만에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함락시키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 사이 발해 노상(老相)이 이끄는 군대와 부딪쳤지만, 노상군은 거란에 곧바로 투항하였다.
이렇듯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제대로 된 전투를 한번도 치르지 못하고 멸망한 것처럼 보인다.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렸던 발해가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단시일에 멸망한 것을 두고, 그 원인에 대해 내분설, 지배층의 도덕적 해이와 사치, 문약해진 사회분위기와 기강해이 등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여 큰 재앙이 일어나 거란의 침공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대인선이 일찍부터 거란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요사』와 『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 등을 통해 요동의 패권을 두고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혈전(血戰)을 벌인 것이 밝혀졌다.
거란은 상경성을 함락시켰지만, 지방을 모두 정복하지는 못했다. 926년 8월까지 막힐부, 안변부, 현덕부, 정리부, 남해부, 장령부에 대한 공격과 반란진압이 이어졌고, 그 후에도 정안국 등 발해 부흥운동이 계속되었다. 대인선은 같은 해 7월에 야율아보기가 거란으로 회군하면서 왕후와 함께 끌려가, 거란의 수도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게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대인선에게 오로고(烏魯古)라는 이름을, 왕후는 아리지(阿里只)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 이름은 『요사』 국어해(國語解)에 야율아보기와 그의 황후가 대인선으로부터 항복받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