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금대 발해 유민 묘지·묘갈은 금대 발해 유민인 장행원·장여유·고송가의 묘지와 묘갈이다. 발해 유민은 발해가 멸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금나라에서도 사회, 정치, 문화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런 사실이 발해 유민의 묘지와 묘갈이 발견되면서 증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발해 유민인 장행원 묘지가 1923년에, 장여유 묘지가 1956년 출토되었다. 이들은 재상까지 올랐던 장호의 아버지와 아들로, 발해 유민 중 가장 현달한 가문이었다. 고송가 묘갈은 1920년대 발견되었는데 발해 대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 고송가 역시 발해 유민으로 보인다.
정의
금대 발해유민인 장행원·장여유·고송가의 묘지와 묘갈.
개설
내용
장행원의 묘지는 1923년 요양시 한가분(韓家墳)에서 경작 중에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장행원 부부의 관 등이 함께 나왔는데, 묘지와 관 모두 유실되었으며, 탁본만이 남아 있다. 탁본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 모두 50㎝이다. 묘지는 천덕(天德) 2년(1150)에 만들어졌다. 장여유의 묘지와 개석은 1956년 9월 북경 서쪽 백만장(白萬庄) 이리구(二里溝)에서 출토되었다. 개석은 길이와 너비가 모두 91㎝이고, 두께는 10㎝이다. 지석은 높이 89㎝, 너비 91㎝, 두께 11㎝이다. 개석은 4자씩 4행으로 “대금고선위장군우선휘사장공묘지명(大金故宣威將軍右宣徽使張公墓誌銘)”이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다. 지석은 해서(楷書)로 39행, 각행 38자이며, 태화(太和) 7년(1207)에 만들어졌다.
고송가 묘갈은 1920년대 무렵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 원양원(遠陽園) 산농원(山農園) 안에서 발견되었다. 묘갈의 크기는 높이가 45㎝, 너비가 29㎝이다. 이 묘갈은 아들인 고보국(高輔國)이 정원(貞元) 3년(1155)에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면서 그 정처(正妻) 대(大)씨와 차처(次妻) 고(高)씨와 함께 합장하며 만들었다. 고송가는 사서에 나오지 않으며, 묘갈의 내용도 매우 소략하여 그 일가의 동향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발해 대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 고송가 역시 발해 유민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역주한국고대금석문』 제3권(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7)
- 『滿洲金石志』 권3(羅福頤, 『石刻史料新編』 제1집 제23책, 新文豊出版公司, 1982)
- 「金<張汝䣭墓誌>考釋)」(侯堮, 『北京文物与考古』 2, 1. 北京燕山出版社, 1991)
- 「金朝治下の渤海人」(外山軍治, 『金朝史硏究』 京都大學 東洋史硏究室,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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