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유민은 발해가 멸망한지 200여 년이 지난 금(金) 나라에서도 사회, 정치, 문화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한 사실이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만들어진 1차 자료인 발해 유민의 묘지와 묘갈이 발견되면서 증명되고 있다. 발해 유민인 장행원(張行願) 묘지와 고송가(高松哥) 묘갈은 1920년대에 출토되어 진위푸[金毓黻] 등에 의해 발해유민으로 소개되었고, 1937년에 출간된 『만주금석지(滿洲金石志)』 권3에 전문이 실렸다. 장여유(張汝䣭)묘지는 1991년에 후어[侯堮]의 「금<장여유묘지>고석(金<張汝䣭墓誌>考釋)」이 『북경문물여고고(北京文物与考古)』 2집에 실리면서 알려졌다.
장행원과 장여유는 조손(祖孫) 관계로, 금 태조(太祖)대로부터 세종(世宗)대까지 5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재상에까지 올랐던 장호(張浩)의 아버지와 아들이다. 장행원과 장여유 묘지명의 발견으로 『금사(金史)』에 나오는 장호 일가의 기록과 함께, 7대에 걸친 장씨 집안의 변천을 알 수 있다. 이들 집안은 요양(遼陽) 출신으로, 금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고관직을 역임한 발해 유민 중 가장 현달한 가문이었다. 같은 집안인 장현정(張玄征)의 딸은 금 세종(世宗)의 원비(元妃)였고, 장여유의 딸은 후궁인 령인(令人)이었다. 유력한 발해 유민들과도 혼인관계를 이루었는데, 장호의 손녀는 금대 문장가로 저명한 왕정균(王庭筠)의 처였고, 장여유의 전처는 세종의 장인인 이석(李石)의 딸이었다. 그리고 장여유의 딸 장옥수(張玉秀)는 발해 대(大)씨인 대중윤(大仲尹)의 조카에게 시집갔다.
장행원의 묘지는 1923년 요양시 한가분(韓家墳)에서 경작 중에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 장행원 부부의 관 등이 함께 나왔는데, 묘지와 관 모두 유실되었으며, 탁본만이 남아 있다. 탁본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 모두 50㎝이다. 묘지는 천덕(天德) 2년(1150)에 만들어졌다. 장여유의 묘지와 개석은 1956년 9월 북경 서쪽 백만장(白萬庄) 이리구(二里溝)에서 출토되었다. 개석은 길이와 너비가 모두 91㎝이고, 두께는 10㎝이다. 지석은 높이 89㎝, 너비 91㎝, 두께 11㎝이다. 개석은 4자씩 4행으로 “대금고선위장군우선휘사장공묘지명(大金故宣威將軍右宣徽使張公墓誌銘)”이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다. 지석은 해서(楷書)로 39행, 각행 38자이며, 태화(太和) 7년(1207)에 만들어졌다.
고송가 묘갈은 1920년대 무렵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 원양원(遠陽園) 산농원(山農園) 안에서 발견되었다. 묘갈의 크기는 높이가 45㎝, 너비가 29㎝이다. 이 묘갈은 아들인 고보국(高輔國)이 정원(貞元) 3년(1155)에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면서 그 정처(正妻) 대(大)씨와 차처(次妻) 고(高)씨와 함께 합장하며 만들었다. 고송가는 사서에 나오지 않으며, 묘갈의 내용도 매우 소략하여 그 일가의 동향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발해 대씨와 혼인한 것으로 보아, 고송가 역시 발해 유민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