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 인물은 한말에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이규(李圭)·강희(姜熹)·이동주(李東柱)·조동식(趙東植) 등이다. 이들은 대한제국 때의 구군인들과 회동해 1919년 3·1운동 후 항일전투기관인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를 안도현(安圖縣) 내두산(奶頭山)에서 조직하였다.
이 군정부에 소속된 병력은 1919년 10월 당시 900여 명이었다. 내도산에는 중국 보위단(保衛團)의 명칭으로 100여 명을, 소사하(小沙河)지방에는 240여명을, 화전현 고상하(樺甸縣古相河)에 100여 명을 분산, 배치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 밖에도 포수 수백명을 사방에 배치해 상당한 무력을 갖춘 독립투쟁부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같은 해 10월 23일 대한정의군정사로 개칭하게 하고 그 기구를 정비하였다.
총재 및 부총재 밑에 사령관·경리부 및 비서과·회계과·서무과·외교과·편집과·통신과를 두었으며, 다시 사령관 밑에는 검사과·심판과·교련과·기기과를 설치하였고, 경리부 밑에는 출납과·모연과(募捐課)를 두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직이 상당히 세밀하고 큰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12월 현재 주요부서의 간부는 총재 이규, 부총재 강희, 사령관 이동주, 비서과장 홍우찬(洪祐贊), 서무과장 강두희(康斗熙), 외교과장 길성익(吉星翼), 편집과장 윤석우(尹錫禹), 검사과장 김정식(金鼎植), 심판과장 연병준(延秉俊), 교련과장 조동식 등이었다.
사령관 예하의 4개부를 설치했는데, 참모부장 이동주, 군무부장 강익성(姜翼成), 경위부장 김병순(金炳淳)·경리부장 강이중(姜以中)이 각각 관장하였다.
이 단체는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군 및 동맹결사 등 다른 무장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두만강을 수없이 건너 조선총독부 예하 헌병대·경찰관서·관공서 등을 습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신문과 잡지를 발간해 교육과 민족정신을 계몽하였다. 1920년부터는 교련과장이었던 조동식의 전술이 그 위세를 전 만주에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8월 일본군의 협공작전으로 영안현(寧安縣)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그해 12월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표 서일(徐一), 대한독립군 대표 홍범도(洪範圖), 대한국민회 대표 구춘선(具春先), 대한신민회 대표 김성배(金聖培), 광복단 대표 이범윤(李範允) 등이 밀산(密山)에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흡수되었다. →대한독립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