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년단연합회 ()

근대사
단체
1919년 만주에서 각 지방 청년단의 집결체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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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만주에서 각 지방 청년단의 집결체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조직구성

오학수(吳學洙)·지응진(池應晉, 일명 仲振)·함석은(咸錫殷)·김창수(金昌洙)·김시점(金時漸)·김승만(金承萬)·오능조(吳能祚)·박춘근(朴春根)·이영식(李英植)·송연주(宋連周)·장재순(張載舜)·곽상하(郭尙夏)·장자일(張子一)·차경신(車敬信)·오동진(吳東振)·백일진(白日鎭)·이애시(李愛施) 등 각 지방 청년단 대표 17명이 각지의 청년단을 통일하고 통일방침 하에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을 기도, 1919년 11월 이 회의 설립취지서를 발송하였다.

그 해 12월 제1회 총회에서 총재 김승만, 부총재 박춘근, 총무 김찬성(金燦星) 등이 임명되었다. 이후 안병찬(安秉瓚)이 석방되어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참여하자 간부진은 개편되었다. 총재 안병찬, 부총재 김찬성, 총무부장 김승만, 서무부장 최지화(崔志化), 재무부장 김시점, 편집부장 이춘근(李春根), 교육부장 이탁(李鐸), 통신부장 오학수, 교제부장 김두만(金斗萬), 노동부장 박춘근, 경호부장 여순근(呂淳根)을 선출하였다. 기관지 주필은 오능조였다.

별동대원(別動隊員)으로는 김영철(金榮哲)·문일민(文一民)·박태열(朴泰烈)·김광진(金光振)·박경구(朴經九) 등이었다. 연합회에 가입한 청년단은 59개 단체에 이르렀고 회원은 약 3만 명에 이르렀다. 1920년 4월 제2회 총회에서 개선된 임원은 서기에 이애시가 추가되고 서무부장 최지화, 교육부장 이탁, 편집부장 박춘근 등이었다.

기능과 역할

총재 안병찬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각 지방에 의용단을 조직해 대규모의 독립전쟁은 정부의 명령을 받을 것이지만, 우선적으로 일본군경·친일세력 토벌에 상당한 수단을 취하고, 기관지를 발간해 세계 대세와 미국의 국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방침과 회의 주의를 선전할 것을 공포하였다.

특히 각 단에서는 10명분 이상의 의용대원 경비를 부담하도록 함으로써, 자력으로 전쟁을 준비할 것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이 회의 주목적은 군자금 모금과 의용대원의 확보로 항일혈전의 감행이었다. 이 회는 국내의 80여 개 단체에 3만 명의 회원이 있었다.

그 중 전투원인 의용대원은 평안북도 벽동(碧潼)·창성(昌城)·의주·삭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0년 2월 광제청년단원(光濟靑年團員) 최봉린(崔鳳麟)이 일본헌병대에서 권총을 탈취하였고, 평양청년단장 박이준(朴履俊)과 단원 계재섭(桂在燮)·박일구(朴日球) 등 11명은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붙잡혔다.

이 해 5월 일본경찰이 강도를 체포한다는 구실로 홍통구를 습격해 함석은이 전사하고 안병찬·오능조·박도명(朴道明)·김인홍(金仁弘)·양원모(梁元模) 등 5명이 붙잡혔다. 그러나 안병찬은 관전현(寬甸縣) 지사에 의해 곧 석방되었다.

이어 7월(실제 방한 8월)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기회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으로 국내의 일제기관을 폭파시키고 민족독립정신의 고취 및 세계여론의 환기를 목적으로 오동진의 지휘 하에 광복군총영 독립군 13명을 3개 부대로 나눠 파견하였다.

제1지대 김영철·김성택·김최명은 서울, 제2지대 문일민·우덕선·안경신·장덕진·박태열은 평양, 제3지대 임용일·이학필·김응식·이진무·정인복은 선천 방면으로 잠입하였다. 제3지대는 분대하여 이진무·정인복는 신의주, 임룡일·이학필·김응식은 선천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총재 안병찬이 상해(上海)로 가고 김찬성이 북경(北京)으로 가자, 김승만이 조직을 이끌다가 1920년 민국독립단과 연합하여 광복군사령부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기관지로 『대한청년보(大韓靑年報)』를 발행하였다. →광복군사령부

참고문헌

『독립군사』(윤병석, 지식산업사, 1990)
『한국독립운동사』 3(국사편찬위원회, 1968)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朝鮮獨立運動』 Ⅱ(金正明 編, 東京: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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