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가(陶山歌)’라고도 한다.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122구이다. 음수율은 3·4조가 주축이며, 2·3조, 2·4조, 4·4조 등도 보인다. 『염와유고(恬窩遺稿)』와 『노계선생문집(蘆溪先生文集)』(중간본, 1904)에 전한다.
『노계선생문집』에는 ‘도산가’라는 표제하에 수록되어 있어, 박인로(朴仁老)의 작품으로 소개된 일도 있다. 그러나 허훈(許薰)이 쓴 「염와조공행장(恬窩趙公行狀)」(舫山文集 卷22)과 조승기(趙承基)가 쓴 「염와조공묘갈명(恬窩趙公墓碣銘)」(恬窩遺稿 卷2)에 의하여 조성신의 작품으로 고증되었다.
작자가 중년에 눈이 어두워지자 젊어서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별과(別科: 본과 밖에 따로 설치한 과)에 참여하였던 사실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술회한 작품이다. 내용은 도산서원의 승경(勝景)과 서원에 치제(致祭)할 때의 광경, 그리고 이황(李滉)의 행적과 덕을 사모하는 5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1단락은 도산은 명승지로 이황의 장수처(藏修處: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는 곳)임을 노래하였다. 제2단락은 작자가 임자년(1792) 3월 예관(禮官)과 함께 도산서원에 가보니, 이황의 수택(手澤: 손이 자주 닿았던 물건에 손때가 묻어서 생기는 윤기)이 역력함을 읊고 있다.
제3단락은 도산서원의 여러 건물을 차례로 돌아보고, 광영대(光影臺)에 올라가서 원근의 산천경개를 바라봄을 노래하였다. 제4단락은 창강(滄江)의 야색(夜色)과 도도한 흥취와 소소한 풍류를 읊고 있다.
제5단락은 시를 읊은 뒤에 하직하고 돌아옴과, 그 뒤 다시 유람하려 하였으나 병을 얻어 뜻을 이루지 못함을 노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