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승만(李承晩)이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私邸)로 당시 서울시 돈암동 인근에 있다 하여 ‘돈암장’이라 하였다. 이 집은 당시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張震英)으로부터 빌린 집으로서, 장진영은 연건평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다른 1채를 빌려주었다.
약 700평의 정원에 뛰어난 미관(美觀)을 지녔다. 장진영은 6·25사변 때 납치되어 죽었고, 돈암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 및 2호로 분할되어 1986년 현재 문화재(현, 국가유산)로 지정받지 않은 채 3명의 소유자에게 나뉘어 있다. 이승만은 환국 후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묵고 경비과중으로 이 집을 찾았다.
이 곳에서는 윤치영(尹致暎 : 비서실장) · 이기붕(李起鵬 : 서무담당) · 윤석오(尹錫五 : 문서담당) · 송필만(宋必滿 : 비서)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 중에는 임영신(任永信)이 간병하였다.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추대되었던 민주의원 의장직을 버리고, 공산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결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열중하였다.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장진영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고, 이 소식을 들은 미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지(Hodge,j. R.)중장의 주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田中)가 쓰던 마포장(麻浦莊)을 얻어 이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