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용정촌에서 박재하(朴載廈) 등이 주창해 재만청년총동맹을 조직, 합리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지적 교육과 실지 훈련을 기하고, 상호 부조의 정신으로 대동 단결에 노력하며, 대중을 위주로 한 신문화 향상에 노력할 것을 강령으로 내걸고 1926년 1월에 만들었다. 11개 연맹에 102개 세포 단체로 조직되었으며, 회원은 약 5,000명이었다.
이 단체는 동만 각지의 청년회를 단일 동맹체로 하여 경성조선청년총동맹, 남북만청년총동맹과 밀접하게 연락하기로 결의했다. 이 총동맹은 정기 대회를 열고 조선 청년대중의 정치와 경제, 민족적인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절대 투쟁하자는 강령과 함께 전민족의 단일당 수립과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폭로하며 총독정치를 반대한다는 표어를 채택하였다.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운동에 참석한 대표 이희태(李羲太)가 촉성회파(促成會派)에 가담한 뒤, 협의회파(協議會派)에 대한 반발을 이유로 당(黨)을 조직한 협의회가 전민족유일당운동을 주최하는 것은 혁명 원리에 위반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촉성회를 지지한 7개 단체 대표가 모여 민족유일당촉성조직동맹(民族唯一黨促成組織同盟)을 만들게 된다.
같은 해 8월 중앙집행위원장에 최영근(崔榮根), 중앙집행위원에 김두용(金斗容)·김하정(金河晶)·김진택(金振鐸)·조숙정(曺淑貞)·지희겸(池熙謙)·전빈(田斌)·장병호(張炳鎬)·문일파(文一波)·조희열(趙喜烈)·김종철(金鍾哲)·원봉희(元鳳熙)가 임명되었다.
또한 중앙검사위원장에 김옥정(金玉亭), 중앙검사위원에 김효종(金曉鍾)·이균(李均), 중앙상무서기 김영호(金英鎬), 문화부장 윤용준(尹容俊), 조직부장 장희철(張熙澈), 조사부장 김재형(金在炯), 소년부장 하광섭(河光燮), 여자부장 김순림(金順林), 체육부장 최종호(崔鍾浩)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 중 13명이 공산당원이거나 공산당 청년당원이고 무소속은 9명이었다. 비록 민족 단결과 청년 단체의 유일 전선을 표방하고 만든 단체였지만 조선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9월 일제 간도총영사관 경찰서에 의해 검거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사실상 동만청년총동맹의 배후 기관이었다. 따라서, 그 해 10월 총동맹 간부도 거의 모두 투옥되었고, 결국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