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회 ()

근대사
단체
1907년 6월 서울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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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1907년 6월 서울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개설

홍재칠(洪在七)과 일본인 다카하시(高橋久司) 등이 한일 양국의 국조 숭경(國祖崇敬), 양국민의 정신적 화목, 그리고 교육·자선·식산(殖産) 발달을 목적으로 창립하였다. 회장에 이윤용(李允用)과 일본인 도우즈(到津公凞), 부회장에 이범규(李範圭)·윤이병(尹履炳)이 선출되었다. 서울 중곡동에 사무소를, 서울 5부(五部)에 지부를 두었다.

기능과 역할

이 해 7월 헤이그특사사건이 알려지자, 7월 12일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외무대신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며, 17일에는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고종에게 동경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죄할 것을 강요했다.

조정 대신들의 이 같은 행위와 일본 외무대신의 입경(入京) 소식이 알려지자, 17일 1천여 명의 회원이 사무소에 모여 특별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윤이병은 고종의 일본행을 막아야 한다고 연설했으며, 회원들은 관련 대신들을 국적(國賊)이라 규탄하였다. 이어 18일 회의에서 이윤용과 이범규가 회장단에서 사임하자, 후임 회장에 윤이병, 부회장에 김재붕(金在鵬)이 선출되어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고종의 양위와 일본행 및 한국에 불리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저지하는 방법이 논의되었으며, 고종에게 관련 대신의 주살(誅殺)을 상소하는 한편, 민중과 함께 저지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종로에서 민중 시위를 주도하고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일본 헌병·경찰과 충돌했다.

포덕문(布德門) 앞에서는 회원들이 민중과 함께 결사회를 조직, 관련 대신들을 살육하는 등의 문제를 결의하였다. 시위는 이튿날인 19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19일 고종의 양위가 결정되자 다시 사무소에서 민중과 함께 회의를 열어 이를 막기로 결의하고, 이튿날 석고단(石鼓壇)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20일 회원들은 석고단에 모인 2만여 명의 민중시위를 주도해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하고 이완용의 집을 불태웠다. 그러나 고종은 이날 끝내 왕위에서 물러났고, 항쟁을 주도한 간부와 회원 및 일반 민중들은 붙잡혔다.

1908년 1월 16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윤이병은 종신 유배형을, 김재붕과 이사 이근우(李根雨)·홍재칠·이광수(李光洙), 평의원 심원택(沈源澤)·여규면(呂圭冕), 회원 차춘성(車春聖)·강만선(姜晩善)·최병선(崔炳善)·조순종(趙舜鍾), 일반인 강준영(姜俊永)·최원석(崔元錫) 등 19명은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달 21일 전라남도 지도(智島)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는데, 이들 중 강만선은 배소에서 순국하였다.

참고문헌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5)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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