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는 작가의 초기 시에 보이던 생명력에 대한 갈구나 병적인 징후가 『귀촉도(歸蜀途)』와 『신라초(新羅抄)』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어느 정도 사라지고, 동양적 체념과 안식의 자세를 취하며 마음의 평정을 도모하던 때이다. 서정주 시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는 사상적 원숙미와 시적 구성력이 가장 고조된 시기라 할 수 있다.
물론, 『동천』에 실린 작품들이 불교의 인연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신라초』의 연장선상에 놓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불교적 설화조의 바탕에 짙은 유미주의적 인식이 착색되어 있음을 그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설화조의 시들이 긴장감 어린 압축미보다는 이야기와 결부된 사색의 깊이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산문적 서술시와는 달리 짤막한 단시의 형식을 통하여 한순간의 정신의 긴장과 감정의 응축을 포착하고자 한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이 시기의 그러한 성향을 대표하는 시가 바로 「동천」인 것이다.
이 시는 전부 5행으로 되어 있으며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각 시행은 7 · 5조를 기반으로 한 3음보의 율격 구조를 가진 것으로 율독(律讀)이 가능하다. 그만큼 이 시에는 우리 고유의 민요나 시조 같은 전통적 시가 형식과의 상관성이 짙게 나타낸다. 그것은 곧 이 시의 근저에 동양적 형식미와 정신세계가 잠겨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 시에서 중요한 해석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은 님의 눈썹과 새의 관계이다. 겨울 하늘의 투명하고 삽상한 공간에서, 시의 화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님의 눈썹을 천(千)날 밤의 꿈으로 씻어서 걸어 놓았다고 진술한다. 그랬더니 추운 겨울밤을 나는 새도 자신의 지극한 정성을 알아보았는지 그 눈썹의 모양과 비슷한 모습으로 피해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정신과 정신의 마주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간절함은 추위도 무서워하지 않는 겨울새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불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 짧은 시 한편에도 시인의 불교적 사유가 은밀히 담겨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작가의 말(「내 연정의 시 '동천'과 윌리엄 포크너의 인연」, 『문학적 자서전』, 은행나무, 2016.)에 의하면 이 작품은 한 여대생 제자를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