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Lebanon)

레바논의 국기
레바논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중동지역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공화국.
이칭
이칭
레바논공화국, Republic of Lebanon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중동지역의 지중해 동부 연안에 있는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레바논공화국(Republic of Lebanon)으로, 해안선의 길이는 225㎞이다. 면적은 1만 400㎢, 인구는 618만 4701명(2015년 기준)이며, 수도는 베이루트(Beirut)이다. 인구의 94%는 아랍인이며, 아르메니아인이 4%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영어와 프랑스어도 통용된다. 종교는 이슬람교 70%, 기독교 30%로 구분되나, 이는 다시 매우 배타적인 17개의 종파로 나누어진다.

기후는 여름에 고온건조하고 겨울에 온난다습한 지중해성 기후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상업·금융업 등이며, 2차산업 중에는 정유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2014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476억 4000만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4118달러이다.

레바논은 아랍권의 나라들 중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 의회민주주의를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1932년에 실시되었던 인구조사를 토대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권력안배를 6:5의 비율로 결정, 의회도 이에 따라 배분되며, 대통령(기독교)·수상(이슬람교)·국회의장(이슬람교)을 해당 종파 중에서만 선출한다. 그러나 독립 이후 회교도의 인구가 증가되어 이와 같은 권력배분은 레바논내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임기 6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28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미래당, 레바논의 힘, 민주개혁당, 민주좌익당, 팔랑게당, 아말운동, 헤즈볼라, 시리아사회민족당, 자유애국운동 등이 있다.

약사

이 지역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며 도시국가를 세운 곳이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전쟁 때에는 셀주크 투르크와 쟁탈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에는 오랫동안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다가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통치하에 놓였다가 1943년 11월 2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 양측간의 충돌사태가 빈발하였다. 또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45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량 유입하여 베이루트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본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레바논 영토 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의 전투가 계속되게 되었다.

이에 맞물려 국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게 되었고, 1975년 4월 이와 같은 갈등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자 시리아군이 개입하여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시리아군은 레바논 동북부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에 무력분쟁이 계속되자 1978년에는 국제연합 잠정평화유지군(UNIFIL)이, 1982년부터는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주둔했다.

198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으로부터 철수하였지만, 다시 이스라엘군 및 시리아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1983년 9월 이후 레바논정부군·기독교민병대·회교민병대 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결국 1984년 2월 회교도 민병대가 서베이루트를 장악하고 친서방 레바논 정부가 시리아의 압력에 굴복함에 따라 같은 해 5월 친시리아 거국내각이 수립되었다.

그 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권력안배를 위한 정치적 절충이 이루어졌으나, 198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내전 수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1985년 12월 시리아의 중재하에 기독교와 이슬람교 시아파, 이슬람교 드루즈파의 세 거두 사이에 평화협정이 조인되어 다시 새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내전은 지속되었다.

이스라엘의 노동당 연립거국내각은 1984년 이스라엘군의 일방철수를 단행하였고, 1985년 6월 10일 잔여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으로부터 완전 철군하였다. 1987년 2월 15일 AMAL 민병대와 PSP 등 좌파연합 민병대 간에 격렬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법과 질서 회복 명목으로 7000여 명의 시리아 군대가 서베이루트에 주둔하게 되었다.

1987년 6월 1일 카라미(Rashid Karami) 수상이 피살되자 호스(Salim Hoss) 수상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1988년 9월 22일 제마엘 대통령이 기독교 지도자 Aoun 군총사령관을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오운(Aoun) 내각과 기존 이슬람교도 호스 내각의 2개 정부가 병존하였다. 1989년 3월 14일 레바논 기독교 지도자 오운 장군은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 퇴진을 목표로 해방전쟁을 선언한 후, 시리아군 및 회교 민병대와 기독교 간 전투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9월 레바논 내전이 휴전되고, 아랍연맹 레바논 주재 3국위원회의 주선으로 레바논국회(기독교계 의원 32명, 이슬람교계 의원 30명)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소집되어 대통령의 권한 축소, 국회의석 재분배 및 시리아군의 재배치 등을 골자로 하는 ‘국민화합헌장’을 잠정 합의하였다. 1990년 9월 21일 엘리아스 흐라위(Elias Hrawi) 대통령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고, 12월 24일에는 카라미(Omar Karami) 수상의 30인 내각이 출범(기독교 15명, 이슬람교 15명)하였다.

1991년 4월 정부는 민병대의 무장해제 및 해체를 실시하였고, 같은 해 5월 20일 레바논·시리아 간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1992년 8월, 20년 만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친이란의 시아파 조직인 히즈라가 처음으로 후보자를 옹립, 14석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라피크 엘 하리리(Rafic El Hariri) 수상의 신내각이 발족되었다.

레바논은 대외적으로 아랍 제국과의 선린관계 유지에 두고 있다. 따라서 중동평화문제에는 아랍권과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우호적 정책을 천명한 뒤 이를 현재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대외정책의 기조는 중도중립의 비동맹으로 1945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는 레바논과 1969년 10월 통상대표관계에 들어가 1970년 1월 베이루트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하였다. 마침내 1981년 2월 12일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이 합의됨으로써 통상대표부는 상주대사관으로 격상되었다.

1982년 11월 레바논 정부는 우리나라 정부에 대하여 한국군의 다국적 평화유지군 참여를 공식 요청하는 등 비교적 호의적 태도를 보였으며, 2005년 1월 경제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다. 2007년부터 우리나라 동명부대가 파병되어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레바논 수출액은 3억 3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전기제품·전자제품 등이며, 수입액은 27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알루미늄·동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36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LG전자와 한전이 진출해 있고, 2명의 한국민 교민과 84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69년 2월 베이루트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1981년 2월 12일 외교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무역대표부는 상주대사관으로 격상되었다. 북한은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의 레바논침공 이전 시기까지 레바논 내 팔레스타인 게릴라 훈련교관을 다수 파견하였고, 레바논 좌파 이슬람교도민병대와는 무기지원 등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양측은 1968년 2월 무역 협정, 1971년 11월 북한기자동맹 및 레바논신문편집인협회 간의 상호협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레바논 안의 한국 문화

레바논 내전 이전에는 우리나라 민속무용단의 방문공연 등 양국간 문화교류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내전 이후에는 뜸한 상태이고, 우리나라 태권도사범 1명이 레바논 정부군에 태권도를 소개, 보급한 바 있다.

참고문헌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중동사』(김정위,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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