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 북부 중앙의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해안선 길이가 1770㎞에 달한다. 면적 175만 9540㎢, 인구 641만 1776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트리폴리(Tripoli)이다. 행정구역은 25개 자치시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은 아랍계 베르베르족이 97%이고, 기타 3%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다. 다른 아랍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가 국교이고, 국민의 97%가 이를 신봉하고 있다.
북부는 지중해성 기후를 이루나 중남부지역은 사막성 기후를 보인다. 국토의 90%가 사막으로 되어 있어 1951년 독립할 당시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1959년 석유가 발견되고 1961년부터 석유 수출이 시작되면서 경제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세계 4위의 석유생산국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강경국이다. 석유일변도의 경제구조를 이루고 있는 관계로 농업 및 제조업은 각각 국민총생산의 2% 및 3%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은 석유생산량과 국제석유가격의 변동에 따라 크게 좌우되고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량은 34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5,430달러이다.
1960년대 석유 개발과 함께 친서방정책을 고수했으나 1969년 9월 카다피(Qadhafi, M. A.)가 주도한 무혈쿠데타의 성공으로 회교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강경노선의 사회주의 인민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의회는 총인민회의로 1,112명의 대표로 구성되며, 아랍사회주의연맹이 유일한 합법정당이다.
리비아의 지중해 연안지역은 고대로부터 페니키아인의 소도시가 번영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의 지배하에서 번영하였고, 7세기부터 아랍인의 정복하에 들어가 10세기에는 아랍족이 원주민인 베르베르족보다 다수족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터키의 세력권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1912년 이탈리아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영국·프랑스에 의해 분할통치되었다. 1951년 12월 24일 국제연합 결의에 의거, 연방입헌군주국으로 독립하였다.
1969년 9월 집권한 카다피 정부는 석유산업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석유 수출로 증대된 소득을 재분배하여 저소득층의 지지를 받아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된 정권을 유지해 왔으며, 1977년 3월에 제정한 헌법으로 인민주권 확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급진적 사회주의정책으로 재산을 국유화당한 중산계급들로부터 반발이 일고 있고, 징병제 실시와 반대세력에 대한 과격한 탄압 등으로 일부 국민의 불만이 잠재되어 있다. 대외정책은 좌경중립으로, 아랍민족주의·반제국주의·반서구주의·반유태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
1955년에 유엔, 1964년에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나 과격한 혁명수출노선을 지향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고, 이집트·차드·튀니지 등 주변 국가와의 충돌도 잦았다. 중동전 때는 석유무기화를 제창하여 생산제한·금수·가격인하 등 제반 문제에 선봉을 섰다.
특히 1986년 4월 15일 미국의 리비아 폭격 및 1988년 미 PANAM기 폭파사건에 리비아인이 기소된 이후 UN의 제재조치가 실행되고, 미·리비아 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처하기도 했으나, 2003년 리비아가 대량 파괴 무기 포기를 선언한 후 서방과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어 2004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재개하였고, 이후 대외적으로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리비아와 1978년 3월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1980년 12월 29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우리나라는 1969년의 카다피 혁명 이전에도 리비아와의 수교를 추진중이었고, 혁명 후 즉시 혁명군사정부를 승인하였다.
양국 관계는 리비아가 카다피 집권 이후 북한과 유사한 정치적 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관계로 주로 건설 진출 등 실질적인 경제협력 관계에 치중해 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양국간에 고위 인사의 상호방문이 증대되고, 경제 이외에도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다.
한편, 1977년 12월에는 의료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99년 9월에는 협정, 2007년 1월에는 무역 협정과 투자보장 협정을 체결하였다. 리비아는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큰 중동의 건설시장으로, 1977년에 시작된 건설업 진출은 1980년대부터 크게 활기를 띠어 1983년 11월 단일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리비아 대수로공사를 우리나라의 동아건설이 33억 달러에 수주하였다.
2015년 우리나라의 대 리비아 수출액은 5억 43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승용차·건설중장비 등이고, 수입액은 1억 81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석유제품·원유·기초유분·어류·철구조물·가죽제품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5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8년 현재 KOTRA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비롯하여 현대·동아·대우 등 건설업체들리 진출해 있다. 또한 태권도 사범과 580명의 한국민이 체류하고 있다.
리비아와 북한은 이른바 반미·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노선에 의해 밀접한 정치적 연대감을 유지하면서 국제무대에서도 북한 지지 일변도의 태도를 보여 왔으나,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에는 남북한에 대한 정경 분리의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리비아는 북한과 1974년 1월 23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82년 10월에는 리비아의 카다피가 북한을 방문하고 우호협력동맹조약을 체결하는 등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였다.
북한과의 사이에는 이밖에도 1975년 1월 무역협정을 체결한 이래 항공운수 협정, 경제·과학·기술·문화협력 협정 등이 체결되어 있다. 경제관계에 있어서 북한은 리비아에 의류·쌀·양식기류·일용잡화 등을 소량 수출하고 있고, 북한의 화물선과 민항기가 평균 월 1회 리비아에 출입하고 있다.
건설분야에서는 북한의 조선경제협조회사가 진출하여 학교·농가주택 등 소규모의 건설공사를 시공하여 왔고, 의료 요원들이 진출하여 있다.
양국 간의 수교 후 우리나라는 수차에 걸쳐 간호원 등 의료 요원을 리비아에 파견하였고, 1999년 9월에는 문화 협정을 체결하여 양국 간의 문화 교류에도 힘쓰고 있으며, 특히 리비아로부터 기술 연수생과 태권도 연수생 등을 받아들여 교육시키는 등의 교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