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사우디 아라비아왕국(Kingdom of Saudi Arabia)이며, 해안선의 길이가 2640㎞이다. 중동의 주요 국가의 하나로, 면적은 214만 9690㎢, 인구는 2775만 2316명(2015년 현재), 수도는 리야드(Riyadh)이며, 하계수도는 타이프(Taif)이다.
종족구성은 아랍인이 90%, 아시아·아프리카인이 10%이며, 아랍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거의 전국민이 이슬람교를 믿으며, 이슬람권 국가 중에서 가장 엄격하고 보수적인 이슬람 생활과 전통관습을 지키고 있다.
기후는 아열대 고기압지대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혹서와 비가 있는 전형적인 사막성기후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며,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밤낮의 기온차도 심하고 때로는 강한 북동풍이 불어 많은 먼지와 모래바람을 동반하는 경우가 있다.
석유생산 이전에는 전통적인 유목과 무역에 의존하였으나 1938년 석유를 생산한 이후에는 현대적 산업과 농업, 유목 및 가내 수공업이 병존하고 있으며, 1970년대 유류파동 이후 막대한 외화수입을 재원으로 활발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였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중화학공업 분야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인력개발을 위해 직업훈련, 해외연수 등으로 기술인력 확충에 노력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걸프 지역 내 공동 안보정책을 강력히 추구하여 걸프만 협력위원회 회원국과 공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회는 엄격한 이슬람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막생활과 현대 문명생활이 공존하는 대가족제도로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6489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677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세습군주제의 국왕중심제이며, 의회는 없고 국왕자문회의(국왕 임명 150명의 위원, 임기 4년)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에는 고대예멘국가가 아라비아반도를 통치하였으며 무하메드 탄생 이후(570년) 이슬람 역사가 시작되었다. 1453년부터 오스만 터키의 지배 밑에 있던 중 1913년 영국의 힘을 빌어 오스만 터키군을 축출하였다. 이후 영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1927년 5월 20일 독립하였으며, 1932년 국명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개칭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코란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법인 〈샤리아법〉을 국가의 기본법으로 하는 절대주의 국가로 국왕은 정치·종교·행정의 3권을 행사하며 종교의 수장을 겸하고 있다.
왕족으로 구성된 왕실위원회와 종교지도자 회의가 국왕선출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국왕은 왕실위원회와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국정을 수행한다.
이슬람법은 〈샤리아법〉과 규율(국무회의를 거쳐 제정되고 왕령으로 승인됨)로 대별되며, 사법부는 3심제도와 사법감찰위원회가 법원을 감독한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1992년 3월에 헌법을 대신할 국가기본법을 제정하고, 국민들이 국정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개혁안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샤리아에 기초한 기본법제정, 지방분권을 위한 행정개혁, 황실자문기관성격의 협의기구인 〈마즐리스알슈라〉의 신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마즐리스알슈라는 그 간의 왕정체제의 획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최초로 국민들이 국가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만(Salman) 국왕은 2015년 1월에 즉위하여 수상 역할을 겸임하며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우경중립의 비동맹중립정책을 표방하며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격상을 위해 친서방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1945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으며, 아라비아반도내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걸프만협력위원회(Gulf Cooperation Council)를 1983년 5월 이 나라 주도로 창설하였다.
공산권국가와는 전혀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비동맹중립 노선을 고수하는 관계로 외국과의 군사동맹을 불허하며, 외국군주둔과 기지설치를 불허하였으나, 걸프전 이후 미국과의 군사협력 유지를 안보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걸프만 주변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해군력이 주둔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우리나라는 1962년 10월 16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여 1973년 7월 주 사우디아라비아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어 2007년 현재 존속되고 있으며,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상주대사관은 1975년 4월에 개설되었다.
양국은 1974년 1월 경제 및 기술협력 협정, 1975년 7월 문화 협정, 1984년 1월 항공 협정, 1984년 10월 감천항 개발차관 협정, 1990년 2월 항공운수·소득면제 협정, 1991년 1월 걸프전 관련 한국군 의료지원단 활동에 관한 지위 협정, 1997년 4월 교육교류 약정, 2002년 4월 투자보장 협정 등을 체결한 바 있다.
또한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간에는 폴리에스터·강관·수리·조선소·콘크리트 등에 합작투자가 이루어졌다.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기술인력을 파견하였으며(농업전문가·철도기술자·전산요원·간호사·기상전문요원·말사육사·태권도교관), 과학기술 부문에서 양국간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는 신라시대에서부터 비롯된다. 흔히 대식국(大食國)이라는 명칭으로 산견되는데, 물론 이 때의 대식국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고 페르시아제국의 전지역을 가리키지만 이미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지역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오랜 기간 교류가 있었던 이 지역과의 관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조선의 쇄국적인 대외정책에서도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의 해외건설에서 첫번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건설시장이다. 1973년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기 시작한 한국의 해외건설을 공종별(工種別)로 살펴보면, 도로·항만 등의 토목공사, 건축공사, 기계 및 플랜트공사, 전기·통신공사, 용역 부문 등이 큰 비중을 각각 차지하여 왔다.
한국건설업체들의 사우디아라비아 건설시장 진출은 1973년 12월삼환기업주식회사가 카이바∼알울라(Alula)간 고속도로공사를 2400만 달러에 수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수주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시장에 대한 최초의 진출일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서 최초 공사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그 뒤 현대건설주식회사가 1976년 6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주베일산업항공사를 성공적으로 완결지어 한국건설기술의 국제적인 공신력을 높였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건설시장에서의 수주액은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여 1978년에는 64억 달러의 수주를 기록하였다.
같은 기간 중 수주액이 급증세를 나타낸 것은, 1974년의 제1차 석유파동에 따른 유가의 폭등으로 석유수입이 급증하자 이를 재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의욕적인 개발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막대한 외화, 이른바 오일달러(oil dollar)의 유입을 통하여 낙후된 경제사회를 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경제개발에 필요한 기술이나 인력, 사회기초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이 부분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던 것이다. 이는 1975∼1978년 동안 크게 늘어난 지출로 인해 개발인플레이션이 극성을 부리자 이를 완화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긴축정책을 폈고 이에 따라 건설경기가 위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9∼1980년의 제2차 석유파동으로 석유수입이 다시 급증하자 우리나라의 수주액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한 이래 최대의 수주규모인 83억 달러의 수주액을 기록하였다. 이때의 중요한 공사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단지조성공사와 국방항공성건립공사가 있다.
한국의 극동건설주식회사가 1979년 8월 4일 수주한 이 외교단지조성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젯다(Zeddah)에 있는 외무성을 국왕이 집무하는 수도 리야드(Riyadh)로 옮기는 것을 계기로, 외국외교관들의 리야드 상주를 위한 새로운 도시건설을 목표로 시작된 공사였다.
1978년 9월 착공하여 1986년 10월 준공된 이 공사의 계약액은 1억 2000만 달러로서 각종 관로(管路)부설과 하수처리시설 및 기타 부대시설공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공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투입된 건설인력은 한국의 기능공 2만 3000명을 포함하여 현지인 1만 2000명 등 연인원 3만 8000명에 이른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방항공성 건립공사는 미륭건설주식회사가 1980년 5월 14일 수주한 공사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할 수 있는 통신·정보시설 뿐만 아니라 핵전쟁 발발에도 대비할 수 있는 각종 현대적 장치를 갖추고 있는 국방항공성 본청 건물을 짓는 공사였다.
1980년 5월 착공하여 1986년 4월 준공된 이 공사의 계약액은 3억 2000만 달러로서 지하 1층 지상 7층의 본청건물을 비롯하여 장관집무건물, 지하사령부건물·주차장·기타 부속건물 등을 짓는 공사였다.
그러나 1982년을 정점으로 우리나라의 사우디아라비아 건설공사 수주액은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첫째 유가하락으로 석유수입이 감소하여 발주량이 줄어들었으며, 둘째 그 동안 사회간접자본공사는 거의 발주되었으나 당초 계획대로 공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공업프로젝트가 기대만큼 증가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한국 업체들의 강점이었던 값싼 임금에 의한 국제경쟁력이 후발개발도상국의 적극적 진출에 따라 점차 약화된 데다, 우리 업체들이 수주공사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시공여건이 악화되자 보다 수익성있는 공사를 수주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에 걸쳐 한국 해외건설의 최대 시장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 한국의 경제는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의 해외건설수주를 통한 막대한 오일달러의 역류로 인해 국제수지 개선은 물론 외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 유입된 외화는 국민소득을 증대시키고 관련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며 고용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가지 공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해외건설업체들은 견적과 설계에서부터 시공과 감리에 이르기까지 각종 기술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으며 나아가 기업의 국제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사우디 아라비아 수출액은 94억 8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자동차·철강판 등이고, 수입액은 198억 60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원유·석유화학제품·LPG 등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24명의 사우디 아라비아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7년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에는 KOTRA와 KOIKA를 비롯하여 대우, 쌍용, 삼성물산, 현대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9명의 한국민 교민과 1278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