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를 틀고 머리카락을 여며서 매는 남성용 머리띠가 망건이며, 갓이나 탕건은 반드시 망건 위에 덧쓰는 것으로서 과거의 남자는 항상 망건을 쓰고 있었다. 상인(喪人)은 포망(布網)을 쓰며, ≪재물보 才物譜≫에서는 흑회(黑繪)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식 표기이다.
망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에 기록이 처음 보이나 비단인지 말총인지 재질은 분명하지 않다. ≪경국대전≫에는 경공장으로서 상의원에 망건장 4명을 배치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간단하게 만들 수 없는 기능적 제품임을 뜻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그 제도가 명나라 태조 때 비롯되어 도사(道士)가 비단실로 망건을 떴다는 고사를 소개하고 있으며, ≪지봉유설≫에는 중국 · 한국 · 류큐(琉球)사람들만이 망건을 썼다는 견문기가 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명주실로 만들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말총으로 만들기 시작한 듯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말총을 활용하는 공예가 매우 성행하여 왕의 관모에도 ‘총겨리겹갓’이 있을 만큼 신분을 초월했고, 탕건과 갓에 이르기까지 널리 활용하였다. 말총으로 관모를 제작한다는 훌륭한 착안과 더불어 그 제품의 정제된 품위는 세계의 어느 모자에 견주어 손색이 없다.
망건은 직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편자[下帶]를 짜고, 중간부위는 망으로 뜨며, 맨 위의 당[上帶]은 고를 내어 신축성 있게 엮음으로써 당줄을 꿰어 죄어맬 때 두상의 생김새에 알맞게 되어 있다. 만들 때는 목제 망건골에 걸어 뜬 뒤 골 채(彩) 끓는 물에 삶아내어 고정시키면 다시 헝클어지지 않는다.
그 다음 검은 명주로 선을 두르고 당줄을 매고 관자(貫子)를 달고 이마 위에 풍잠을 붙여 완성한다. 관자는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어 1품 벼슬은 비취관자, 2품은 금관자, 3품 이상 당상관에는 옥관자를 다는 등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19세기에 망건의 명산지는 대구 · 공주 · 석성(石城) · 김제 · 평양 등지라고 기록되었으나 최근에는 제주의 여성들에 의하여 명맥이 이어지고 있고, 현재 그 기능보유자는 제주의 이수녀(李受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