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묵암 최눌(默庵最訥, 1717∼1790)은 조선 후기 송광사(松廣寺)를 본거지로 한 부휴계(浮休系)의 적전(嫡傳)으로 풍암 세찰(楓巖世察)의 제자이다. 화엄(華嚴)을 비롯한 교학에 정통하여 『묵암집(默庵集)』 이외에도 『화엄품목(華嚴品目)』, 『제경회요(諸經會要)』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대둔사(大芚寺)의 연담 유일(蓮潭有一)과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의 문제를 둘러싼 '심성 논쟁'을 펼치치기도 했다. 1770년 해남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을 맡았고, 입적 후 송광사 부도전에 탑이 세워졌다.
최눌의 행장을 쓰고 책을 편집하여 펴낸 제자 와월 교평(臥月敎萍)이 그의 선법을 전해 받았다.
『묵암집』은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1801년(순조 1) 송광사에서 와월 교평이 간행하였다. 책의 표제는 『묵암집』이며, 제1권의 권수제는 『묵암대사시초(黙庵大師詩抄)』, 제2권은 『묵암집서신(黙庵集書信)』, 제3권은 『묵암집소문(黙庵集疏文)』으로 되어 있다.
1801년 여름에 교평이 쓴 발문(跋文)에 의하면 최눌은 『내외잡저(內外雜著)』 10권을 지었는데, 6권이 유실되고 남은 4권에서 발췌한 내용을 모아 『묵암집』을 펴냈다고 한다.
책머리에는 양주익(梁周翊)이 쓴 「서(序)」가 나온다.
제1 상권의 시초(詩抄)에는 오언절구(五言絕句) 36편 40수, 칠언절구(七言絕句) 65편 84수, 오언사운(五言四韻) 15편 19수, 칠언사운 8편 9수 등 124편 152 수의 시가 실려 있다. 영조 대에 삼정승을 역임한 김상복(金相福)을 비롯해 고위 관료 및 저명한 유학자와 주고받은 시가 다수 수록되어 있고, 일본 승려에게 보낸 시도 볼 수 있다.
제2 중권에는 편지글 16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연담 유일 등 승려들을 포함해 유학자 및 관료들과 주고받은 서간문(書簡文)이 확인된다. 「상완부정후백(上完府鄭侯伯)」, 「상김정랑(上金正郞)」, 「답임진사서(答任進士書)」, 「상여시거사(上如是居士)」 등의 편지글은 불교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에게 불교의 이치와 역사를 설명하고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는 유불일치설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권에는 소(疏) · 권문(勸文) · 상량문(上樑文) · 서(序) 등 15편이 들어있다. 그중 「봉갑사탱화권선소(鳳岬寺幀畫勸善疏)」, 「왕축소(王祝疏)」, 「백암비석권소(柏庵碑石勸疏)」, 「송광사영자전상량문(松廣寺影子殿上樑文)」, 「송상은서(送尙隱序)」, 「측신제문(厠神祭文)」 등을 통해 당시의 불교계 상황과 불교 의식, 최눌의 교유 관계 및 불교 사상 등을 알 수 있다.
또한 하권에 실린 「폐지상소(廢紙上疏)」는 당시 큰 사찰에 부과되었던 종이 만드는 지역(紙役)의 부당성을 14개 조목에 걸쳐 반박한 글이다. 이 글은 최눌이 징광사(澄光寺)에 있을 때 폐단이 큰 종이 공역(貢役)의 폐지를 징광사 승도의 명의로 영조에게 올린 장문의 상소문으로 당시 불교계의 경제적 상황과 그것을 대처하기 위한 승려들의 노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제자 교평이 기록한 「묵암대화상행장」과 최눌의 다른 제자 낙현(樂賢)의 삶을 채록한 「봉암대사행장(鳳庵大師行狀)」, 교평이 쓴 「묵암화상문집간행후발」, 1801년 6월 지족거사(知足居士)가 쓴 발문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문제자질(門弟子秩)」이 실려 있다.
『묵암집』은 18세기 부휴계의 고승이자 화엄 학승인 묵암 최눌의 시문집으로 최눌의 선 사상과 교학 사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더불어 이 책은 유 · 불 교류의 구체적 양상과 당시 불교계의 생생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