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년(인종 8) 건립. 원비는 비신높이 1.35m, 너비 1m이다. 청평산 문수원(文殊院)의 중수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이다.
원래는 비의 상·하부가 깨진 채로 청평사에 세워져 있었으나, 6·25 때 심히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수원은 현재의 청평사로서, 그 전신은 보현원(普賢院)이었다. 고려 예종 때의 명신 이자현(李資玄)의 아버지 이의(李顗)가 춘주감창사(春州監倉使)로 부임하면서 옛날 당나라 승려 영현(永玄)이 세운 백암선원(白巖禪院)의 옛터에 절을 세워 보현원이라 하였다.
1089년 (선종 6)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여 불법(佛法)을 연구하고 후진을 가르치면서 산이름을 청평이라 하고, 원명(院名)을 문수라 고쳐 중수하였다. 이자현이 죽은 뒤, 나라에서는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적을 새겨 비를 세우게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이 비이다.
비문은 김부철(金富轍)이 짓고, 글씨는 탄연(坦然)이 쓰고 지원(知遠)이 새겼다. 비의 윗부분은 갈碣처럼 둥글게 되어있고 비의 상단부에 제액이 있는데 ‘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를 6행 행2자씩 자경(字徑) 10㎝의 해서(楷書)로 새겼고, 비문은 행서(行書)로 자경 2㎝ 안팎이다.
비석의 뒷면은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제자인 혜소(慧素)가 이자현이 죽은 해인 1125년(인종 3)에 지은 제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도 탄연의 글씨다. 탄연의 행서는 신라의 영업(靈業)과 함께 해동명적(海東名跡)으로 꼽히는데, 왕희지풍(王羲之風)의 행서로 출발하여 운치가 풍부한 새로운 글씨체를 형성하였다.
비는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앞면의 문수원기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대체로 찬자와 서자는 비문의 앞쪽에 적혀있는데 이 비에서는 찬자와 서자가 비문의 말미에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