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의 문신이며 학자인 문익점의 묘이다. 문익점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아버지는 숙선(淑宣)이며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급제한 뒤 김해부 사록(司錄) 등을 역임하였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었다. 원에서 귀국할 때 목화씨를 숨겨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하여 우리나라 의생활 발전에 혁신을 가져 왔다.
조식(曺植)은 후일 선생의 공로를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과 같다.”고 찬양하였다. 전의주부(典儀主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전제개혁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 강성군(江城君)에, 1440년(세종 22)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고향인 경상남도 산천군 단성에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長興)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목화에 관한 사적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묘는 방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묘 앞에 상석과 비, 그리고 좌우에 문인석·망주석·석등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