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복(子復). 고려 첨의정승(僉議政丞) 민지(閔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상정(閔祥正)이고, 아버지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이다.
1365년(공민왕 14) 10월 전리판서(典理判書) 한천(韓蕆) 주재하의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다.
1374년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에 제수, 그 뒤 고려대를 통하여 14년간이나 관직(館職)을 띠고 제고(制誥)에 참여하였다. 1377년(우왕 3)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예의총랑(禮儀摠郞)을 거쳐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가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려 파면되고, 4년 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복직되었다.
고려 말에는 삼사의 좌윤과 우윤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사은사(謝恩使)인 문하시랑찬성사 우인렬(禹仁烈)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내왕, 귀국 즉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제수되었다. 곧 교서감감(校書監監)을 거쳐, 평양교수(平壤敎授)로 파견되었다.
문묘(文廟)를 수리하고, 학규(學規)를 엄히 하면서 훈회(訓誨)에 전력하는 등 유학진흥과 유교의례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1395년 한성에 태묘(太廟: 종묘)가 세워지면서 예악정비(禮樂整備)가 요청되자 전고(典故)에 밝다 하여 특별히 소환되어 국왕의 친관(親祼: 親祭)을 위한 대례(大禮)의 완비에 공헌하였다.
곧 퇴직하여 후진을 교육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일고(逸稿)를 수집하여 정리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質直敦厚: 질박 정직하면서 성품이 너그러움)하였고, 고려 말에는 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 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권근(權近)과 교우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