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안인

  • 역사
  • 인물
  • 고려 후기
  • 조선 전기
고려 후기에, 통례문지후, 예의총랑, 전법총랑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자복(子復)
인물/전통 인물
  • 본관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 사망 연도1398년(태조 7)
  • 성별남성
  • 주요 관직통례문지후|예의총랑|전법총랑
  • 출생 연도1343년(충혜왕 복위 4)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한충희 (계명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 후기에, 통례문지후, 예의총랑, 전법총랑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복(子復). 고려 첨의정승(僉議政丞) 민지(閔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상정(閔祥正)이고, 아버지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65년(공민왕 14) 10월 전리판서(典理判書) 한천(韓蕆) 주재하의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다.

1374년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에 제수, 그 뒤 고려대를 통하여 14년간이나 관직(館職)을 띠고 제고(制誥)에 참여하였다. 1377년(우왕 3)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예의총랑(禮儀摠郞)을 거쳐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가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려 파면되고, 4년 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복직되었다.

고려 말에는 삼사의 좌윤과 우윤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사은사(謝恩使)인 문하시랑찬성사 우인렬(禹仁烈)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내왕, 귀국 즉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에 제수되었다. 곧 교서감감(校書監監)을 거쳐, 평양교수(平壤敎授)로 파견되었다.

문묘(文廟)를 수리하고, 학규(學規)를 엄히 하면서 훈회(訓誨)에 전력하는 등 유학진흥과 유교의례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1395년 한성에 태묘(太廟: 종묘)가 세워지면서 예악정비(禮樂整備)가 요청되자 전고(典故)에 밝다 하여 특별히 소환되어 국왕의 친관(親祼: 親祭)을 위한 대례(大禮)의 완비에 공헌하였다.

곧 퇴직하여 후진을 교육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일고(逸稿)를 수집하여 정리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質直敦厚: 질박 정직하면서 성품이 너그러움)하였고, 고려 말에는 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 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권근(權近)과 교우가 깊었다.

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태조실록(太祖實錄)』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민안인묘지명(閔安仁墓誌銘)』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