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계사(季思). 예산 출신. 민열(閔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오상(閔五常)이고, 아버지는 사직 민질(閔質)이며, 어머니는 우계충(禹繼忠)의 딸이다.
1517년(중종 12) 충청감사 김근사(金謹思)의 천거로 참봉이 되고, 1518년 군자감주부를 거쳐 감찰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중종이 천거로 등용된 관원들을 인견(引見)한 자리에서 민회현은 치도(治道)의 핵심으로 어진 이를 선발하여 수령에 임명할 것과 임금의 덕을 밝힐 것을 주장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안당(安瑭)으로부터 “언론이 해박하고 통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47세 때인 1519년에 조광조 등이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추진한 현량과(賢良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민회현의 천목(薦目)에는 “지조가 순수하며 독실하고, 또 재행(才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기묘사화로 출신자 방목(榜目)이 혁파되어 직첩과 홍패(紅牌)를 몰수당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한거하였다. 그 뒤 20년이 지난 1538년 이조판서 윤인경(尹仁鏡)의 건의에 따라 직첩을 환급받고 좌랑에 복직되었다.
파과(罷科: 과거가 무효됨)된 뒤 고향에서 한거하고 있을 때 결성현감(結城縣監) 조우(趙佑)가 민회현을 위로하기 위하여 수차에 걸쳐 모시려 하였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