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영변 출신. 어려서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던 심익창(沈益昌)에게 수학하였다.
마침 김일경(金一鏡)과 원휘(元徽)가 차례로 영변부사로 부임해 심익창의 집에 자주 드나들자 이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뒤에 궁궐에 환관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김일경과 박필몽(朴弼夢)을 필두로 한 소론측은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는 것을 저지하려다 실패하자, 박상검을 이용해 왕세제를 제거하려 하였다.
박상검은 먼저 김일경으로부터 윤취상(尹就商)·원휘·심익창 등을 통해 받은 은화 수천 냥을 이용해 환관과 궁녀들을 매수하였다.
그리고 1722년 1월 궁 안에 돌아다니는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로 청휘문(淸暉門)에 여우덫을 놓고 함정을 파놓아 왕세제가 경종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시선(視膳: 왕세제나 왕세자가 왕의 수라상을 살피는 일)하러 가는 길을 가로막아 경종과 왕세제 사이에 불화를 조성하였다. 또한 대전(大殿)의 궁녀들로 하여금 왕세제를 헐뜯는 말을 하도록 해 왕세제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왕세제가 그날 밤 입직 궁관(立直宮官)과 익위사관(翊衛司官)을 불러모아 놓고 환관 한두 명이 나를 제거하려 하니 그들의 독수(毒手)를 피하기 위해 사위(辭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튿날 아침 대신들의 주청으로 주모자를 국문하라는 경종의 명이 내려 국문이 시작되었다.
이때 왕세제로부터 지목받은 박상검과 환관 문유도(文有道)는 곧 주륙(誅戮)되었고, 나인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은 자살해 전모가 채 밝혀지기도 전에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뒤에 김일경은 신임사화 때의 죄목으로 영조가 즉위하자 곧 사형당했고, 사건의 전모는 1725년(영조 1)에 환관 손형좌(孫荊佐)를 국문할 때 조금씩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