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비안(比安)이며 자는 여상(汝祥), 호는 율정(栗亭)이다. 할아버지는 박윤보(朴允甫)이고, 아버지는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박점(朴漸)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박서생을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인이라 하였는데, 그는 길재의 행장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정언에 제수되었다. 박서생은 이후 응교·집의 등 주로 언관직에 종사하였다. 특히 1420년(세종 2) 집의로 재직할 당시 상왕인 태종의 행차를 막고자 언론을 펼쳤다가 상주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공조참의·병조참의·집현전 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박서생은 1428년(세종 1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때 수차(水車)의 이점과 그 도입을 건의해 농사기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아울러 그가 보고한 일본의 정세와 왜적의 동태는 이후 조선이 일본에 대한 정책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박서생은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714년(숙종 40)에 건립된 구천서원(龜川書院, 의성군 구천면 산구동에 소재)에 박의중(朴宜中), 이우(李瑀), 김효정(金孝貞)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1898(고종 35)년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에 ‘박서생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박서생의 학풍, 야은 길재와의 관계 등 박서생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