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시(金昌始)·장홍익(張弘益)·양재학(楊載鶴)·고윤빈(高允斌)·김지혹(金志或)·김양혹(金良或)·김봉조(金鳳調)·김봉규(金鳳奎)·이방욱(李邦郁) 등과 함께 홍경래란(洪景來亂)의 거사계획에 가담하였다.
이때 형 박성간(朴聖幹)은 막대한 양의 돈과 쌀을 대어 거사를 도왔다. 1811년 12월에 가산(嘉山)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무기·식량 등의 군수물자 보급을 담당하다가 곧 장홍익과 함께 붙잡혔다.
선천으로 압송되던 중 신현(薪峴)에서 김사용(金士用)에 의하여 구출되자 바로 곽산군아(郭山郡衙)로 쳐들어가 군수 이영식(李永植)을 사로잡고 군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탈출한 이영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오자 형 박성간과 함께 도주하였다. 그 뒤 1812년 정월에 만호(萬戶)를 지낸 바 있는 구성(龜城)의 김지환(金志煥)과 곽산의 한량 원영정(元永丁)의 군에 의하여 그 아들 박인초(朴仁初)·박인복(朴仁福)과 함께 사로잡혀 3부자가 모두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