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

박승희
박승희
연극
인물
해방 이후 「혈육」, 「홀아비형제」, 「고향」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 신극운동가.
이칭
춘강(春崗)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64년
출생지
주소
정의
해방 이후 「혈육」, 「홀아비형제」, 「고향」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 신극운동가.
개설

호는 춘강(春崗). 서울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한말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판서 박정양(朴定陽)의 셋째아들이다. 장훈보통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동경유학 시절에 당시 일본의 무르익은 신극운동에 쏠려 연극공부에 전념하면서, 일본의 연극들을 열심히 보았다.

대학 재학 중인 1923년에는 평소 가까이 지낸 김기진(金基鎭)·김복진(金復鎭)·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문학예술의 동호회인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였다. 민중계몽을 위하여 연극을 하자고 주장하여 토월회를 신극단체로 만들었는데, 그 뒤 토월회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막대한 유산까지 연극운동에 쏟아 넣었다.

그의 첫 희곡은 토월회의 제1회 공연(1923.7.)으로 올린 <길식 吉植>으로서, 구도덕에의 항거를 그리고 있다. 제2회 공연에서는 쇼(Shaw.G.B.)의 <오로라>의 번역을 맡았고, 마이아 펠스타의 <알트 하이델베르크>의 주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이 때 여배우 이월화(李月華)와 염문이 있었고,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이월화가 토월회를 떠나게 되었다.

제2회 공연을 마친 뒤 창립동인들이 대부분 탈퇴하고 박승희만 남아, 학생극단이었던 토월회를 직업극단으로 개편하고 회장직과 연출부를 맡았다. 제3회 공연에 자신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을 공연하였다.

1925년에는 광무대(光武臺)를 토월회의 전속극장으로 계약하였고, 극단에서 최초로 월급을 주고 여배우 복혜숙(卜惠淑)·석금성(石金星)을 맞아들였다.

그 해 자신의 희곡작품 <산서낭당>과, 각색 <희생하는 날밤>을 공연하였다. 연중무휴로 3일마다 극본을 바꿔가며 공연하였던 토월회의 각본을 거의 혼자서 담당하였다.

그는 서양작품들을 각색, 상연하던 종래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광수(李光洙)의 <무정 無情>·<개척자>·<재생> 등을 각색, 상연하였다. 혼자서 창작·각색·번역·연출·자금제공 등을 맡아서 열심히 뛰었는데도 유산 300석 지기 땅을 한 해 동안에 몽땅 없애고, 토월회가 계속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자 1926년 4월에 제56회 공연을 끝으로 토월회를 해산하였다.

1928년에 토월회의 재기공연을 가졌는데, 이 때 자신의 희곡 <이 대감 망할 대감>과 윤심덕(尹心悳)의 정사(情死)를 소재로 한 <사(死)의 승리>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또다시 토월회의 재기공연으로 자신의 희곡 <아리랑고개>를 상연하였는데, 이 작품은 민족수난의 현실을 절실하게 다루어 인기를 모았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고 토월회가 해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31년에는 방송극협회를 조직해보기도 하고, 극단 ‘대장안(大長安)’을 새로 창단하였으나 공연은 하지 못했다. 1932년에 토월회를 태양극장으로 개칭·개편하고 연극을 계속하였으나, 이 때부터는 종래 작품의 재상연으로서 주로 지방순회를 하며 1940년까지 이끌어갔다.

광복 직후인 1946년에는 토월회의 옛 단원들을 모아 토월회를 재건하여 <사십년> 등 자신의 희곡 3편을 공연하였으나, 극단 유지가 안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극계를 떠나 서울 정릉 골짜기와 연건동 부근에서 만년을 보냈고, ≪사상계≫에 1963년 5월호부터 3회에 걸쳐 <토월회 이야기>라는 자신의 회고담을 연재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정신과 육체를 줄기차게 짜내었으나 나의 일생사업인 연극은 아무 성공이 없이 흐지부지 흘러가고 말았다.”라는 회한어린 말로 끝을 맺고 있다. 1963년 6월에 드라마센터가 주관한 제1회 한국연극상을 수상하였다.

그가 연출자로서 상연한 작품은 토월회만도 180여 회나 되며, 신작공연에 쓴 각본은 번역·번안·창작·각색으로 200여 편이나 된다. 창작희곡 중 남아 있는 작품은 <이 대감 망할 대감>과 <혈육>·<홀아비형제>·<고향> 등 4편이며, <아리랑고개>는 이를 연출하였던 박진(朴珍)의 회고적 구성으로 윤곽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대감 망할 대감>은 고전소설 <배비장전>에서 소재를 따온 희극이며, <혈육>과 <아리랑고개>는 암담한 식민지현실을 그린 사회성이 강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홀아비형제>와 <고향>은 식민지 현실의 궁핍상을 감상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경향은 대체로 투철한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현실도피적인 체념과 감상주의적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신극운동가로서의 박승희는 토월회를 이끌어나가면서 1920년대의 대표적이고 지속적인 신극운동을 벌였으나, 점차 자금난과 각본난에 시달리면서 통속적인 신파극단으로 변모되어간 토월회와 궤(軌)를 같이한다.

그러나 그는 각본·연출·극단경영 등 연극의 다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신파극을 이 땅에 토착화한 첫번째 공로자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한국현대희곡사』(유민영, 홍성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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