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승(汝升), 호는 유곡(楡谷). 할아버지는 박두익(朴斗益)이고, 아버지는 박태흥(朴泰興)이며, 어머니는 홍만겸(洪萬兼)의 딸이다.
1726년(영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740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744년 다시 지평이 되어 시폐(時弊)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가 문제가 되어 갑산부(甲山府)에 유배되었다. 1746년에 풀려나 1748년 고산도찰방 겸 교양관(高山道察訪兼敎養官)이 되어 사재를 털어 폐지된 지 오래던 시사교양(試士敎養)의 제도를 다시 세워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1750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고, 이듬해 장연부사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의 진휼에 진력하였다.
뒤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장령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으며, 1759년에는 박치룡의 간언이 대간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하여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의 구명을 위하여 상소하였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크게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형의 하나로 죄인을 가시울타리로 쳐서 행동을 억제시킴)되어 적소에서 죽었다. 1777년(정조 1)에 대사간, 1801년(순조 1)에 대사헌에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 청백리(淸白吏)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