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초명은 박홍로(朴弘老), 자는 응소(應邵), 호는 이호(梨湖). 영의정 박원형(朴元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수(朴洙)이고, 아버지는 도정(都正) 박난영(朴蘭英)이며, 어머니는 남대년(南大年)의 딸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2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 때 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이 김응남(金應南)의 제주목사 임명을 다시 회수하기를 청하였다. 1590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593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며, 군량미 조달을 위해 전라도에 조도어사(調度御史)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다시 교리가 되었다. 1595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승진해 시독관(侍讀官)을 겸했으며, 우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부족한 군량미 확보에 힘을 다였다.
159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대사성·도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로 다녀와 1599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고, 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대사헌, 이어서 호조참판·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어 『황화집류(皇華集類)』를 편찬하였다.
1603년 행대사헌·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1605년 형조판서, 이듬해에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형조판서 재직 때 피죄관노(被罪館奴: 죄인의 혐의로 잡힌 관소속의 노비)의 추국(推鞫: 죄인을 심문함)을 철저히 하지 않고 성급히 매듭지은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607년 병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가 되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와 지경연사(知經筵事)을 겸했으며,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호조판서에 이어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좌찬성에 승진하여 가례도감제조(嘉禮都監提調)를 겸하였다. 161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시약청도제조(侍藥廳都提調)를 겸하였다.
이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복위 음모와 관련,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