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0.72m, 너비 0.3m, 두께 0.24m. 신라 중기의 승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발연사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며 이곳에 7년 머무르다 마침내 절 동쪽 큰바위에 올라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진골을 옮기지 못하고 공양하니 해골이 흩어지매 여기에 흙을 덮어 유궁(幽宮)을 삼았다고 한다. 비의 4면에 모두 글이 새겨져 있으나 각면 모두 아랫부분이 마멸되어 문자는 많이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비문의 찬(撰)·서(書) 및 수립연대는 장골탑비 말미에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찬(撰)한 사람은 비구(比丘) 형잠(瑩岑)이며 쓴 사람은 이자림(李子琳)이다.
건립연대는 『삼국유사』에 “승안4년기미입석(承安四年己未立石)”에 비추어, 승안이 금(金)나라 장종(章宗)의 연호이며 그 4년이 기미에 해당되므로, 1199년(신종 2)이다. 비문은 정간선을 긋고 그 안에 글씨를 새겼는데 서체는 북위풍의 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