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고분(渤海古墳)은 고구려계의 돌무덤과 말갈계의 흙무덤을 중심으로 벽돌무덤, 탑무덤, 금당식무덤이 나타나는 발해 영역의 무덤이다. 돌무덤은 굴식과 구덩식의 돌방무덤 및 돌널무덤이 있고, 흙무덤도 널무덤, 돌깐무덤, 돌돌린무덤 등으로 다양하다. 장법도 단인장, 다인합장, 1차장, 2차장 등이 있다. 이는 발해 주민 구성이 단일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탑무덤과 금당식무덤의 존재는 발해 왕실이 불교에 심취하였음을 말해 주며, 돌무덤과 흙무덤의 분포는 발해를 구성하였던 고구려계와 말갈계 주민들의 기본 거주 지역을 반영한다.
발해고분은 고구려계의 돌무덤과 말갈계의 흙무덤이 주축을 이루며, 드물게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벽돌무덤도 있다. 그 외에 발해의 매우 특징적인 탑무덤과 금당식무덤도 확인된다.
돌무덤은 발해의 구국(舊國: 대조영이 698년에 성을 쌓고 발해를 건국했던 동모산을 포함한 초기 도읍지)과 상경이 있었던 목단강 상류와 중상류 지역 및 중하류 지역, 중경이 있었던 부르하통하〔布尔哈通河〕와 해란강 및 두만강 중류 지역, 동경이 있었던 두만강 중하류 지역, 남경이 있었던 청진 및 남경으로 가는 길목인 화대와 북청과 같은 동해안 일대에 집중 분포한다.
그 외에도 상경에서 서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제2송화강 상류역인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 유역과 솔빈부(率賓府)의 치소인 동녕대성자고성이 있는 라즈돌나야강 유역에도 적지 않은 수의 돌무덤이 분포한다.
발해의 돌무덤은 서쪽으로 훈허〔渾河〕 유역의 석대자산성 주변 고분군과 시가고분군, 북쪽으로 제2송하강 중하류역의 대해맹유적과 사리파고분군 및 오사훈허〔烏斯渾河〕 유역의 대반도고분군, 동쪽으로 라즈돌나야강 유역의 체르냐찌노5고분군에서도 발굴되었다. 그 외에도 북쪽으로 멀리 아무르강 너머의 파지프리브레즈나야고분군에서도 발해 시기 돌무덤이 조사된 것이 있다.
이와는 달리 흙무덤은 대체로 라즈돌나야강이나 루드나야강 등 옌하이저우〔沿海州〕의 중부와 북부 지역 그리고 흑룡강-아무르 유역에 집중 분포하며, 드물게는 돈화육정산고분군 등 발해의 중심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대체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제2송하강 중하류 지역과 목단강 상류역, 라즈돌나야강 유역에서는 사리파고분군, 돈화육정산고분군, 체르냐찌노5고분군 등 하나의 고분군에 돌무덤과 흙무덤이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고, 그 북쪽 지역에는 흙무덤이, 그 남쪽 지역에는 돌무덤이 기본적으로 축조되었는데, 발해의 구성원이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 주민들의 기본 거주 영역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발해고분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러시아인들이 삼릉둔1호분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일본인 학자들이 이 무덤을 재조사하면서 화룡북대지고분군을 발굴하였다. 하지만 발해고분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 조사는 1949년에 돈화육정산고분군 2호 무덤인 정혜공주무덤이 발굴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이후 1950년대 말부터 목단강 유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지표 조사와 1970년대에 시작된 연변 일대의 개발에 따라 다수의 발해고분군이 발견 및 조사되었고, 1977년에는 라즈돌나야강 유역의 동녕대성자고분군이, 1980년에는 화룡용두산고분군의 정효공주무덤이 각각 발굴되었다.
1992년에는 상경성 주변의 홍준어장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모두 323기의 발해무덤이 발굴되었다. 발해의 최고 지배층과 관련이 있는 돈화육정산고분군과 화룡용두산고분군은 20042009년과 20042005년에 각각 다시 발굴되었다.
북한 학계가 발해의 고분유적을 접한 것은 1964년 돈화육정산고분군에 대한 조중공동 발굴 조사에서였으나, 북한 지역 내의 발해고분 발굴 조사는 1986년에 평리고분군에 대한 발굴을 시작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와 동해안 일대의 궁심고분군 등 다수의 발해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러시아 옌하이저우에서는 1959년에 꼬쁘이또 절터 주변의 몇몇 돌무지 유구들에 대해 발굴을 하여 고분으로 보고한 적이 있으나 고분으로 인정 받지 못하였다. 이후 1998년과 2003년에 각각 시작된 체르냐찌노5고분군과 끄라스끼노2고분군에서 돌무덤이 발굴됨으로써 옌하이저우에도 발해고분군이 존재함을 증명하였다.
다만, 옌하이저우에서 흙무덤이 중심인 발해고분군은 1986년에 모나스뜨이르까3고분군이, 1990년에 로쉬노4고분군이 각각 발굴된 바 있다. 아무르강 북쪽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말갈계 흙무덤군으로는 뜨로이쯔꼬예고분군이 있다.
발해고분에 대한 연구는 형식 분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대적 및 절대적 편년 문제는 돈화육정산고분군 정혜공주무덤(780년)이나 화룡용두산고분군 정효공주무덤(792년)과 순목황후무덤(830년)과 같이 절대연대(絕對年代)가 알려져 있는 몇몇 무덤을 제외하면 아직 체계가 잡혀 있지 못하다.
다만, 천장 구조가 삼각고임이나 삼각평행고임식인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되며, 유사 굴식돌방무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학계에서는 흙무덤의 경우 모두 발해의 전기로 편년하고 있으나, 말갈계 흙무덤은 발해 이전과 발해 존속 시기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기 때문에 흙무덤이라는 이유로 모두 이른 시기로 편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발해고분은 축조 재료에 따라 돌무덤, 흙무덤, 벽돌무덤으로 크게 구분되나, 벽돌무덤은 사실 돌을 함께 사용한 무덤이 대부분이다. 연구자들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돌무덤은 매장 주체부의 구조에 따라 굴식돌방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 돌널무덤으로 구분이 가능하며, 규모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굴식돌방무덤은 중앙 널길, 우편재(右偏在) 널길, 좌편재(左偏在) 널길 등 널길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돈화육정산고분군, 화룡용두산고분군, 삼릉둔고분군 등 왕실 구성원이나 귀족의 무덤에는 무덤길도 시설하였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 다수이며, 정혜공주무덤이나 장인고분군 대형분 등 천장이 삼각고임 혹은 삼각평행고임인 경우에는 방형도 있다.
그 외에 함경도 궁심고분군 등에는 평면 원형의 널방 내부에 돌널을 조성해 놓은 경우도 있다. 평면 장방형의 굴식돌방무덤에는 삼각평행고임천장과 평행고임천장 혹은 평천장을 조성하였다. 대형이나 중형의 굴식돌방무덤 중에는 정효공주무덤과 삼릉둔고분군 2호 무덤, 돈화육정산고분군 6호 무덤, 금성리벽화분 등과 같이 벽화무덤도 있다.
굴식돌방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 중에는 체르냐찌노5고분군의 경우와 같이 평천장에 널방의 너비보다 훨씬 짧은 널돌을 다수 사용하여 봉한 경우가 있는데 발해고분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형의 굴식돌방무덤에는 무덤 위에서 주춧돌이나 기와가 발견되는 경우가 다수 있어 묘상건축(墓上建築)이나 기와이기의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흙무덤은 단순한 널무덤도 있고, 무덤구덩이의 바닥에 돌을 깐 것, 둘레에 돌을 돌린 것 등 몇 가지 형식이 보이며, 돈화육정산고분군의 경우에는 무덤 둘레에 호석을 두른 경우도 다수 있다. 라즈돌나야강 유역의 흙무덤에는 관을 사용한 경우도 있으나, 더 북쪽의 흑룡강-아무르강 유역에는 대부분 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1차장 혹은 2차장을 하였으며 무덤 내에서 번소를 한 경우도 있다. 토광무덤의 한 특징은 무덤구덩이만 흙으로 메우고 그 위로 봉토를 거의 조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드물게는 무덤구덩이 위를 돌로 엎은 경우도 있다.
벽돌무덤은 화룡용두산고분군 1호(정효공주무덤)와 10호 무덤, 8호와 15호 무덤, 13호와 14호무덤, 마적달탑무덤, 영광탑무덤, 하남둔고분, 홍준어장고분군의 일부 무덤 등 매우 제한된 수가 확인되었다.
그중 화룡용두산고분군 1호 정효공주무덤과 10호 무덤, 마적달탑무덤, 영광탑무덤은 모두 무덤 위에 전탑을 세운 탑무덤이며, 화룡용두산고분군 13호와 14호 무덤 및 하남둔고분군은 이혈합장(異次合葬)의 금당식무덤으로서 모두 왕실 구성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무덤과 금당식무덤은 발해 왕실이 불교에 매우 심취하였음을 보여 준다. 벽돌무덤은 특정 시기, 특정 인물들에게만 사용된 무덤 형식일 것이다.
장법은 단인장도 있으나, 다인합장이 다수이며, 1차장과 2차장이 있고, 하나의 무덤에 1차장과 2차장이 함께 적용된 경우도 있고, 삼릉둔고분군 2호 무덤의 경우에는 시신을 위아래로 포개어 중첩 매장한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