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어장고분군은 발해 수도인 상경성유적지에서 서쪽으로 약 6.5㎞ 떨어져 있다. 돈화 육정산고분군 및 화룡 용두산고분군과 함께 대표적인 발해 고분군이다. 고분군은 두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며, 모두 323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발해시기 고분군 가운데 무덤수가 가장 많다. 홍준어장고분군은 발해 상경 지역에 살던 귀족과 부민(富民)의 공동묘지로 여겨진다.
홍준어장고분군은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되었다. 중국 헤이룽장성문물고고연구소에 의해 1984년과 1992~1995년에 발굴이 이루어져, 모두 323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고분군 유적의 전체 크기는 동서 약 220m, 남북 약 200m이며, 가운데로 난 작은 길을 경계로 북쪽 1구역과 남쪽 2구역으로 구분된다. 북쪽 사구에 위치하는 1구역에서는 모두 39기의 돌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들은 규모가 작은 편이며, 장축은 대부분 남북 방향을 이룬다. 2구역에서는 모두 284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전실무덤 2기, 전석혼축무덤 1기를 제외한 281기는 돌무덤이다. 무덤의 장축은 1구역과 마찬가지로 남북 방향이다. 2구역에서는 무덤 외에도 방형 구조물 7기와 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다.
1구역과 2구역을 합쳐 320기에 달하는 돌무덤은 홍준어장고분의 주 묘제로, 축조방식에 따라 크게 석실묘, 석광묘, 석관묘로 구분된다. 이중 석실묘가 247기로 가장 많다. 석실묘는 연도의 유무와 형태, 묘실의 개수에 따라 구분되는데, 묘도가 중앙에 있는 삽 모양 석실묘, 칼모양, 장방형, 쌍실석실묘 등으로 구분된다. 석실묘의 묘실은 지상이나 반지하 혹은 지하에 조성되었고, 묘실의 벽은 돌을 수평으로 또는 수직으로 세워 쌓았다. 무덤 바닥에는 판석이나 자갈을 깔았고, 적색의 벽돌을 깐 경우도 있다. 석광묘는 30기가 조사되었다. 규모는 석실묘보다는 작고 석관묘보다는 크다. 대부분 지하식인데 먼저 장방형의 묘광을 파고 각 벽에 돌을 쌓은 다음 천장을 봉하였다. 석관묘는 26기가 조사되었는데 규모가 작아 아이를 매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준어장고분군의 매장 방식은 1차장, 2차장으로 구분되고, 다시 묻힌 사람 수에 따라 단인, 2인, 3인 다인장 등으로 구분된다.
홍준어장고분군은 발해의 다양한 묘제와 매장 방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게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발해의 물질문화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323기의 무덤 중 160기에서 부장품이 출토되었고, 194기에서는 봉토의 흙 속에서 유물이 나왔다. 고분군에서 조사된 유물은 약 2000여 건에 달한다. 1구역과 2구역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나온 것은 물레나 손으로 빚어 만든 토기이다. 1구역에서는 109건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무덤 당 평균 2.8건에 달한다. 유물의 종류는 도기, 철기, 동기, 금은기 등이 있다. 2구역에서는 무덤 당 평균 5건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1구역 보다 종류가 다양하여 도기, 철기, 동기, 골기, 칠기, 옥기, 금은기,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생활용구, 생산도구, 병기, 마구 및 장식품 등이 확인되고 있다. 1구역과 2구역은 무덤의 구조나 유물의 수, 품질 등에서 경제적,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보인다. 1구역보다 2구역이 등급으로 볼 때 상위에 속한다.
홍준어장고분군의 성격에 대해 발굴보고서에는 평민무덤 또는 상경지역에 거주하던 토착말갈세력이 남긴 무덤으로 보고 있다. 홍준어장고분군은 비교적 초기유형을 유지하고 있는 1구역에서 2구역으로 발전했고, 그 중심묘제는 지상에 매장주체부를 둔 석실묘이다. 석실묘는 장방형석실묘에서 칼모양 석실묘를 거쳐 다시 삽모양 석실묘로 변화해 갔다. 여러 유형의 석실묘가 2구역에 집중되어 있고, 무덤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은 토착세력이 무덤을 축조했다기 보다는 인구유입에 의한 조영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상경 지역이 발해의 수도가 되면서, 이 지역에 인구가 집중되었던 현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무덤의 유형 변화는 무덤 주체 세력의 등급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런 장식이 없던 무덤에서 꾸밈이 있는 무덤으로의 변화는 매장주체들의 신분이 상위계층임을 보여준다. 더욱이 홍준어장고분군에는 평민이나 말갈무덤으로 보이는 토광묘가 전혀 없다. 따라서 이 고분군의 성격은 발해 귀족이나 관리 혹은 부유한 백성들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