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대의 주1 광산인 백년광산은 1931년 주민들에 의해 알려졌으며, 1932년 개발에 들어갔다. 원윤수(元胤洙: 18871940)가 일화광업상회(日華鑛業商會) 합자회사를 세우고 백년광산을 운영하였다. 폭약을 이용해 광석 채취에 나서던 1933년 4월에는 폭파 장소에서 260m 떨어진 동네의 5세 어린아이를 숨지게 하는 사건도 있었다. 황해북도 곡산군 이령면 거리소리(巨利所里) 뒤의 백년산에는 45개의 광산이 있어서 사람이 빈번하게 왕래하는데도 호랑이가 출현하여 밤에 외출을 자유롭게 하지 못할 정도로 산이 깊었다. 곡산군에서 시작한 백년광산의 본사가 지금 신평군에 있는 것은 두 군 사이에 백년산이 있어서이다. 개발 초기인 1934년에 이미 백년광산은 시가 300만 원으로 매장량이나 품질로 보아 동양 최대의 텅스텐[중석] 광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37년 한반도 내에서는 연 2,000톤의 중석이 생산되었으며, 그중 절반이 백년광산에서 생산되어 대부분 수출하였다. 백년광산을 통해 광업계의 거물이 된 원윤수는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공로자명감』[1935년]에 이름이 올랐으며, 최창학 · 방응모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3대 광산 재벌로 불렸다. 원윤수는 1937년에 용산고보 설립, 1938년 성남고등학교 설립 등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백년광산은 1937년 조선식산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은 소림광업(小林鑛業)에 매각되었다. 백년광산을 매수한 일본인 기업 소림광업[고바야시광업]은 소림백년광산주식회사를 신설하며 ‘소림 동족의 순연한 동족(同族)회사’로 규정하면서 사장으로 고바야시 우네오[小林采男]를 선임하였다. 백년광산을 비롯하여 소림광업이 소유한 광구의 본사 주소는 일본인이 집단 거주하던 서울[경성 명치정]에 두었다. 1938년 조선텅스텐수연광업조합 및 조선텅스텐수연상협회가 설립되고, 1939년 ‘텅스텐광수연광배급조정규칙’ 공포 등 조선총독부의 통제 정책 시행 과정에서 소림광업처럼 일본인이 특혜를 보았다.
해방 이전 텅스텐 광산은 총 19개소였으며, 그중 6개의 생산 책임제 실시 광산으로 백년광산이 꼽힐 정도로 중요 광산이었다. 1944년 생산 실적을 보면 같은 면에 소재한 기주광산이 1,732톤으로 가장 많이 생산하였으며, 그다음이 842톤을 생산한 백년광산이다. 백년광산은 1953년 세부 탐사에서 잔존 매장량은 WO3 기준 1만 1458톤, 전망 매장량 WO3 기준 6만 2124톤으로 나타났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백년광산과 기주광산을 통합하여 1급 기업소인 곡산중석광산으로 운영하였다. 종업원 3,500여 명이 남산갱, 중절갱, 원곡갱, 가락갱, 정리갱, 북부갱, 조선인민창건 20주년갱, 건설갱, 탐사갱, 운반갱, 중앙수갱 등에서 일하고 있다. 선광장의 처리 능력은 연간 35만 톤이며, 연간 5,000톤의 주2을 생산하기도 하는데, 2004년 기준 정광 2,538톤을 생산하였다.
백년광산은 1958년 김일성이 현지 지도한 후, 이 자원이면 만 년 동안 부강할 수 있다고 말한 이후부터 만년광산으로 개명하였다. 1989년에는 한국언론에서 만년광산의 정광 운반 로봇이 생산공정에서 실용화되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1990년 북한의 중석 매장량은 23만 2000톤이며, 양덕, 경수, 고성, 장전, 금강 등 9개 중석 광산 중에서도 만년광산이 가장 잘 개발된 것으로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