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내백(來伯), 호는 구룡재(九龍齋). 세거지는 고성(固城). 아버지는 백수화(白受和)이고,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시봉(李時逢)의 딸이며, 허간(許侃)의 문인이다.
11세에 벌써 칠서(七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주역』, 『서경』, 『시경』)를 다 읽고, 15세 때부터는 가난하여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몸소 밭을 갈고 땔나무 지개를 졌다. 밭을 갈 적에는 그 때마다 밭이랑의 길이와 수에 따라 횟수를 정하여 글을 외는데, 행여 횟수를 다 채우지 못하면 밤에 또 외었다.
이렇게 반복하던 중, 어느날 피로에 지친데다 냉기(冷氣)가 치켜올라서 두어 말[斗]의 썩은 물을 토하고 까무라쳤다가, 이윽고 깨어났는데 이 뒤로부터는 밤새 글을 읽어도 정신이 맑고 피로하지 않았다 한다.
그 뒤 8년 동안 산방(山房)에 들어앉아 제경(諸經)·제자(諸子)를 빼놓지 않고 연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과 『맹자(孟子)』를 더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경(敬)’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거류산(巨流山) 밑에 ‘구룡재(九龍齋)’라는 정사(精舍)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여 이광벽(李光壁)·심취제(沈就濟)·허건(許健) 등 천여 명의 학자를 배출시켰다. 저서로는 『구룡재문집(九龍齋文集)』 3권, 『역대통운(歷代通運)』 8권, 『사서통리(四書通理)』 4권, 『삼경통의(三經通義)』 6권, 『서역(序易)』 2권이 있다.